레논 님의 sub2smi 자막을
FPS 23.976 → 24
변환 후 싱크 수정했습니다.
레논 님 고맙습니다.
[Original] - SUB 변환 원본 자막
[Revision] - 일부 수정 수정 자막(수정 사항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HanSolo 님의 작성 글 참고했습니다).
수정 사항
-향기 님의 영문 자막 확인 후 ykp008 님의 한글 자막으로 수정했습니다.-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이 부분이 계속 나와서 수정해 봤습니다.
듣기에도 다르게 들리는데 상황에 안 맞는 번역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 하지만 벨 데 주르가 오는 건 몰랐어요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 그리고 벨 데 주르를 위해
'미녀도 아니잖아' 역시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아 수정했습니다.
미녀도 아니잖아 →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단평 : 어린 짐승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부뉴엘의 10년 후 응답으로서 본편을 지정한다면 엔딩은
더욱 갸륵하게 다가올 것이다.' 갸륵'은 '딱하고 가련하다' 혹은 '착하고 장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로 통용된다. 영화 속 세브린느는 물론이고 종교, 성, 죽음의 삼각형에
항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부뉴엘의 맥락에 적확한 진술로서 본편을 휘감는다.
무엇보다 본편은 수미상관에서 드러나듯이 원근법의 영화다. 여기서 원근법이란 단순히
캔버스의 기법으로서 한정되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거대해진다'는
본편의 내러티브 효과를 지시한다. 서두의 마차에서 짓눌린듯한 세브린느는 엔딩의 그 곳에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순례자 세 편의 엔딩이 현실로 귀결하는 자연주의를 탐했다면
본편은 <황금시대>의 여인이 귀향 정착한 듯 최종적인 초현실의 환타지를 구가하고자한다.
세브린느의 캐릭터 이미지는 그가 텅 빈 눈을 지속한다는 점에 있는데, 이는 기존 평문처럼
욕망의 결여로부터 비롯된다. 즉, 그는 상상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상징계의 전도사인
잇송과의 대면 이후 순식간에 남근의 실재계가 침범한다. 하지만, 부뉴엘은 히치콕과 달리
그 지점을 상징계로 회귀시키기를 거부하고 다시금 교복을 입은 채 상상계로 연장시킨다.
여기에는 계급에 대한 조롱도 첨가되지만, 무엇보다 의학이라는 남근에 대해 무의식과
상상력의 자리로 저항하려는 의지가 작용한다. 마치 저택의 외양과 나뭇잎을 오버랩시켜
한동안 그 프레임을 지속시키는 이미지의 중첩과도 같다. 만일 세브린느의 별명처럼 오후가
아름답다면 그건 시간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시각을 잃은 것은 남편일까? 그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