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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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린느 (Belle De Jour,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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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우아하고 지적인 미녀 세브린은 의사인 남편 피엘과 유복하게 살고 있지만 일에 열중해 있는 남편에게서 소외감을 느낀다. 물밀 듯이 밀려드는 권태감, 이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그녀는, 남편과 마차를 타고 가다 자신을 창녀라고 욕을 하며 산 속에서 끌고 들어가 묶어놓고 채찍을 맞는 등 비정상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은 그녀로 하여금 가서는 안될 곳에 발을 들여놓게 만든다.   남편 친구인 잇송씨로부터 고급 요정의 주소를 듣고, 한동안 갈등하다, 숨막힐 듯한 자신의 권태에서 벗어나고픈 일념에 남편이 병원에서 일하는 시간에 그곳에 나가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소나마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곳을 찾아온 잇송씨와 만난 후, 세브린은 아이를 바라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에 그만 그곳을 뛰쳐나오고 만다.   그 일을 계기로 다시 평범한 가정 주부로 돌아온 어느날 세브린 앞에 한 젊은이가 나타난다. 그는 소매치기 건달로, 하룻밤 손님으로서 그녀를 찾아왔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남편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하고 귀가하는 피엘을 쏘아 쓰러뜨린다. 결국 자신은 경찰의 총탄에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아내가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피엘은 식물인간이 된 것처럼 가장한다. 그런데 잇송이 찾아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하러 왔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조바심에 있던 세브린은 남편이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는 세브린에게 산으로 휴가를 간다는 말을 한다. 밖에서는 마차의 방울 소리가 들린다.

레논 님의 sub2smi 자막을 

 

FPS 23.976 → 24

 

변환 후 싱크 수정했습니다.

 

레논 님 고맙습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744850&sfl=wr_subject&stx=%EC%84%B8%EB%B8%8C%EB%A6%B0%EB%8A%90&sop=and

 

 

[Original] - SUB 변환 원본 자막

[Revision] - 일부 수정 수정 자막(수정 사항은 아래를 참고해 주세요).

(HanSolo 님의 작성 글 참고했습니다).

 

수정 사항

 

-향기 님의 영문 자막 확인 후 ykp008 님의 한글 자막으로 수정했습니다.-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이 부분이 계속 나와서 수정해 봤습니다.

듣기에도 다르게 들리는데 상황에 안 맞는 번역 같아서 수정했습니다.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 하지만 벨 데 주르가 오는 건 몰랐어요

 

벨르 드 주르도 한 잔 줘 → 그리고 벨 데 주르를 위해

 

 

'미녀도 아니잖아' 역시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아 수정했습니다.

 

미녀도 아니잖아 →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Comments

S 컷과송
2020. 6. 11. 재감상

단평 : 어린 짐승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부뉴엘의 10년 후 응답으로서 본편을 지정한다면 엔딩은
더욱 갸륵하게 다가올 것이다.' 갸륵'은 '딱하고 가련하다' 혹은 '착하고 장하다'라는
두 가지 상이한 의미로 통용된다. 영화 속 세브린느는 물론이고 종교, 성, 죽음의 삼각형에
항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부뉴엘의 맥락에 적확한 진술로서 본편을 휘감는다.

​무엇보다 본편은 수미상관에서 드러나듯이 원근법의 영화다. 여기서 원근법이란 단순히
캔버스의 기법으로서 한정되지 않고 '멀리 있는 것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거대해진다'는
본편의 내러티브 효과를 지시한다. 서두의 마차에서 짓눌린듯한 세브린느는 엔딩의 그 곳에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순례자 세 편의 엔딩이 현실로 귀결하는 자연주의를 탐했다면
본편은 <황금시대>의 여인이 귀향 정착한 듯 최종적인 초현실의 환타지를 구가하고자한다.

세브린느의 캐릭터 이미지는 그가 텅 빈 눈을 지속한다는 점에 있는데, 이는 기존 평문처럼
욕망의 결여로부터 비롯된다. 즉, 그는 상상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상징계의 전도사인
잇송과의 대면 이후 순식간에 남근의 실재계가 침범한다. 하지만, 부뉴엘은 히치콕과 달리
​그 지점을 상징계로 회귀시키기를 거부하고 다시금 교복을 입은 채 상상계로 연장시킨다.

여기에는 계급에 대한 조롱도 첨가되지만, 무엇보다 의학이라는 남근에 대해 무의식과
상상력의 자리로 저항하려는 의지가 작용한다. 마치 저택의 외양과 나뭇잎을 오버랩시켜
한동안 그 프레임을 지속시키는 이미지의 중첩과도 같다. 만일 세브린느의 별명처럼 오후가
아름답다면 그건 시간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시각을 잃은 것은 남편일까? 그녀일까?
3 hommedk
감사합니다.
14 cowboy
감사합니다.^^
11 먹는게낙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9 공처가
고맙습니다.
18 조니존
감사합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4 민초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