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타나 (Tristana, 1970) Luis Bunuel

자막자료실

트리스타나 (Tristana, 1970) Luis Bunuel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828382

서버의 압력만 가중시키는

또 새삼스러운 부뉴엘의

트리스타나 입니다.



academy-poster-for-luis-bunuels-tristana-1970-mouse-mat_1275235.jpg
 

PS: 잘 만들어진 호림아 님의
자막이 블루레이에 너무 안 맞아(자체가 들쑥 날쑥)
새로 수작업으로 씽크 작업. 일부 오타 교정한
5% 수정자막입니다. 원 작업자 님께 감사를 올립니다.(더 이상 교정이 없기를...)

 

Comments

14 별빛사이로
줄리아노님 자막 감사합니다.
근데 [트리스타나 (Tristana, 1970)]의 자막이 아녜요. ㅠ.ㅠ
S 줄리아노
앗, 이런 대 실수를...
다운 받으신 23분 어쩌죠?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올렸습니다.ㅠㅠ
4 탱이vv
자막 감사합니다~
3 선키드
goooooooooood
GIVE 10 MP 17 실룩이
영상을 얼마전에 받았습니다.제가 모르는 영화가 많네요..
작업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
S 줄리아노
댓글내용 확인
24 Vandam
감사합니다
9 공처가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0. 6. 11. 감상

단평 : 복수는 너/나의 것

감독의 자조적인 언급처럼 본편은 기시감이 짙은데, 이는 <비리디아나>와 <세브린느>에서
비롯된 바 크다. 동일한 배우의 동일한 캐릭터, 노골적인 비난을 담은 대사의 남발과 예측
가능한 꿈의 예지적 초현실 등은 부뉴엘 세계의 삼위를 소요하는 관객들에게 관습적이다.
​이에 필요한 것은 빗겨간 시선과 자리일텐데, 그 중점에 하인의 단락을 배정할 수 있다.

부뉴엘의 세계에서 마치 무존재인 것처럼 기계로서 처리된 하인의 위치는 본편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부여받지만, 어디까지나 계급을 기표화하는 존재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하녀의 일기>, <짐승> 등의 전복성 시도는 예외적이며 오히려 부뉴엘은 하인의
비존재성을 관객이 감지하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부르조아 계급의 동화 요소로 일치시킨다.
오프닝에서 하녀는 트리스타나와 같이 등장하면서 동일한 상복의 검은 색을 유지하고,
마지막 등장에서 자본가 계급에게 맛있는 차를 대접하는 부속품이자 장치로 고정될 뿐이다.

본편에서 하녀의 위치를 분배하는 인물은 농아 소년인데, 그는 노동을 거부하고 고용주인
여성을 욕망하는 등 저항감을 내재하면서도 부뉴엘의 하층민들이 그러하듯 휴머니즘이
완벽하게 부여되지 않는다. 그의 '청각장애와 말하지 못함'은 일관된 의미로 기능하기보다
규제 아래 놓인 여성 욕망과 충족될 수 없는 노인의 성욕이라는 양가성을 은유함에 가깝다.
첫 등장에서 소년은 발을 거는 존재이며, 이는 욕망에 대한 규제와 폭발, 둘 다를 지시한다.
 
근친상간의 남근적 불구성을 기반으로 하는 본편의 출구는 부뉴엘의 세계에서 일회성으로
소비된 예술이지만, 영화는 끝내 모델화된 여인이나 여인을 그린 화폭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카메라가 근친상간의 도시 외부로 외출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되는데, 트리스타나와
그의 출구인 화가 애인이 난 이후에 가부장의 욕망은 마지막 권능을 발휘한다.

남성을 넘어선 자본가였던 누이의 죽음과 트리스타나의 우측 다리 절단이 그것이다.
두 사건 모두 노인 남성이 개입된 것은 아님에도 서사의 결은 그것들이 모두 그의 쇠락과
함께 종속됨을 지시한다.  이는 가부장이 친구들과 차를 마실 때 트리스타나가 목발로
복도를 걷는 교차편집의 압박과 긴장으로 돌출된다. 혹은 남근 모양의 종을 트리스타나가
밀칠 때 보이는 목 잘린 노인의 꿈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영화는 어떤 측면에서든 결코
화해의 후세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직 닫혀진 문과 얼어붙은 눈만이 악연을 대체한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1 TAXIDRIVER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