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디아나 (Viridiana, 1961) Luis Bu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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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디아나 (Viridiana, 1961) Luis Bun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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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새삼스러운

루이스 부뉴엘의 문제작

비리디아나 입니다.

 
viridiana-de-luis-bunuel-dvd_962512.jpg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느낀 느낌은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다시 고화질로 보아도 무게감은 변함 없군요. (고수님들 다 보셨을...)


Viridiana.1961.720p.BluRay.AVC-mfcorrea[21-07-07].JPG

 

세계적으로 문제를 불러일으킨 그 장면

부랑자들의 최후의 만찬 입니다. 



PS: 졸린고양이님의 원자막을

고화질에 씽크 작업, 일부 교정한

5% 수정 자막입니다. 감사드립니다.

 

Comments

1 flawless
감사합니다!
1 flawless
학살의 천사 한글자막은 없을까요..
S 줄리아노
제가 올린 자막이
회원 자막 자료실에 있습니다.
1 flawless
레벨이 안돼서 확인은 못하네요
여튼 감사합니다..
22 컷과송
2020. 6. 2. 감상

단평 : 집(城/性)은 검다.

성 聖스러움이 속 俗​됨으로 이동하게 된 사유부터 접근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본편을
 헐리우드의 50년대 종교물들 <쿼바디스>, <성의>, <기적>, <벤허>, <십계> 등에 대한
 반발에 부뉴엘의 카톨릭 시선을 부착하여 단순 해제할 경우 계급이 탈색되기 때문이다.
즉, 오프닝의 수녀복에서 중핵은 '수업료, 막대한 돈'이라는 자본과 종교의 영합에 있다.
프롤로그의 거대한 기둥의 사진과 두 수녀 뒤의 기둥이 어떤 남근인지는 명확하다.

스페인 프랑코 정권으로의 귀환이나 칸의 영예를 둘러싼 찬반 논쟁에서 빗겨간다면
 본편을 민중 불신으로 지정함을 부정할 수 있다. 실존주의의 문채로서 모든 이는 결코
 긍정화될 수 없다. 가령, 저택의 집사나 상속자 남성의 전 애인 등은 그들의 '떠남'이라는
 결정 안에 스스로 자기 불신을 내재화하고 있다. 전자는 계급, 후자는 성욕의 지위다.
 '완전히' 떠나는 지주는 서류 작성 전에 기이한 미소를 품고, 유서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본편의 유일한 의구심은 그 미소는 어떤 자신감에 근거하여 미래를 지배하는가에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엔딩에서 상속자가 '처음부터..' 생각했다고 진술함을 상관할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자본의 자신감이 그저 늙음-젊음이라는 외양만 변형되었음을 은근히 지시한다.
근친상간은 고정되고, 목을 매단 시체의 얼굴이 보여지지 않는 것처럼 초상이 바뀐 것이다.

이의 감시자로서의 소녀는 죽은 지주와 산 노숙인을 종교의 성 聖/性으로 승계 속박한다.
자신을 사람들이 해칠거라는 소녀의 말에 어머니는 '넌 살아남을거다'라고 간단히 응한다.
 '최후의 만찬' 패러디나 강간범들이 예술가 혹은 복장도착자라는 정체성보다 악랄한 지점은
 부뉴엘의 동물로서의 견공이 마차 아래에 묶여 노예화됨에 대한 자연주의화에 있을 것이다.

 <나자린>의 로드무비 반대편에서 본편은 '집'의 존재론적 규정 하에 오직 자본의 후계자만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권능을 하층민의 부덕함에 비해 부드럽게 갈무리한다. 교차편집된
 집의 수리와 하층민들의 야외 기도 의식은 생산력의 관점에서 이미 한쪽을 폐기 복선한다.
맑스의 명제를 빌자면 '존재-집은 의식-속됨을 규정한다'. 손거울 한쪽이 깨져있는 이유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4 Cinephile
감사합니다~~
1 분실해찌
고맙습니다
9 공처가
감사합니다.
15 Harrum
댓글내용 확인
S 줄리아노
그렇군요... 한번 살펴봐야... ㅠㅠ
15 Harrum
댓글내용 확인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