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 비지니스 (Monkey Business, 1952) Howard Haw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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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 비지니스 (Monkey Business, 1952) Howard Haw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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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혹스의

명작 코미디인 이 영화를


TEAM ACE님의

기존 자막을 1CD로 합쳐서

씽크 수정 하였습니다.


앳된 마릴린 먼로도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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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S rayphie
고맙습니다.
S 컷과송
단평 : 원숭이 왈 "너희에게 사랑있으라"


본편에서도 제목은 영어 제목 그대로를 사용했기에, 우선적으로 제목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몽키는 당연히 실험동물인 극중 침팬지 원숭이를 지칭하고,
비즈니스는 과학실에서 침팬지가 행하는 엉뚱한 화학 성분 혼합을 일컫는 말이다.
즉 몽키 비즈니스는 겉으로는 침팬지의 실험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차라리 의역으로서 원숭이의 기적 정도로 전환시킬 수도 있겠다.

본편의 의도는 명확하다,
침팬지를 통해서 인간의 억눌린 퇴행 욕망(혹은 젊어지려는 야심)을 실행시키고
 기실 그것이 그다지 추천할만한 경험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서 현실로 되돌아가게하려는 보수성이 그것이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고싶다는 인간의 오래된 야심을 원숭이가 실현시켜 주었다는 설정은 희극이지만,
극 내부를 실제로 받치고 있는 쾌락은 젊은으로의 변신 에피소드에서 찾을 수 있겠다.
캐리 그란트는 전작에서보다 확실히 더 늙은 중년으로서 등장하는데
 특히 뿔테 안경 속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그에게서 어떤 활력도 기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오프닝에서 부인과의 무도회 외출을 과학 실험 상상이라는 이유로 잊어버리는데,
여기에는 그가 더 이상의 외부 시선으로부터의 로맨틱함을 상실한 남성이라는 상징이 도사리고 있다.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에 한 차례, 이후 다시 한 차례식 캐리 그란트는 하워드 혹스에게서
"Not Yet 아직 아니야 캐리"라는 말을 듣는다. 이 설정 자체를 극 내부로 편입시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하워드 혹스가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냄으로서 본편이 영화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장치
 즉 환타지 로맨스라는 장르적 속성이 관객들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여지게 하는 형식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도 좋겠다.

그럼에도 캐리 그란트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장면은
 이어지는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설명에서도 말했듯이 그가 집 안 혹은 실험실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즉, 그는 자신만이 가지는 쾌감으로서의 사회성이 제대로 있는지 의문인 남성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다시 한번 중년 남성임에도 부인 외에도 어떠한 자녀도 보이지 않는 불임도 한 몫을 한다.
기실 스크루볼 코메디는 아기라는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 장르는 어른들의 아기 놀이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 캐리 그란트는 결국 어떠한 실험도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는 과학자에 머문다는 점은
 라스트 숏에서 마치 대사로 주제를 설파하는 후진 문법처럼 말로 정리하고자 할 때
 혹스가 다다른 본편의 결코 내밀하지 못한 우스개는 다름 아닌 마음의 작용에 있음과 합치된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성공한 과학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위 장면에서 원숭이는 이것저것 아마도 조련사가 훈련한대로 물약을 섞으면서 재미있어하듯
 과정으로서의 혼합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은 유물적인 것이 아니라 유심적인 것에 있다는 전환이다.
여기서 변신이란 분명히 유심적인 것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스는 육체적인 한계와 이탈에 대해서보다는
 젊음이라는 마음의 활력이야말로 우리가 되찾아야할 이상적인 시간이라는 초라한 결론은
 오히려 이전의 남성들의 죽음에 대한 강박이 본편에서는 젊음에 대한 퇴행으로 하강하지 않았나라는 의심이 들게한다.

중요성을 부여하기에는 다소 미약하지만,
늙은 남성 침팬지의 옷을 입은 젊은 여성 침팬지 에스더가 젊음을 되찾는 시약을 만들었다는 설절은
 동물의 도움을 받아 변신하는 인간이라는 기본 테제 이외에 젊은 여성이라는 은밀한 성적 의미도 잔존한다.
하지만, 본편은 중년 부부의 사랑이라는 안전한 장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이것을 가능한 은폐한다.

당대 26살의 마릴린 먼로는 예상 외로 선배인 라티 헤이워드나 캐서린 헵번같은 늘씬한 여신 이미지가 아닌
 그저 통통한 얼굴에 키작고 귀여우며 보호받아야할 여성 이미지로서 본편에서 조연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캐리 그란트에게 매혹되어 잇으나, 정호가한 이유는 제시되지 않은채
 그와 데이트를 기꺼이 즐기는 사장의 여비서로 출연하는데, 주목할 점은 그녀가 백치미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스스로 이 점을 알기라도 하듯이 연신 걸음걸이에 리듬을 넣으면서 자신을 어필하려 애쓴다.
이전에 누구에게나 알려진 "이브의 모든 것"이나 "아스팔트 정글"보다는 확실히 많은 대사를 소화하지만,
그녀는 유먕세를 떨치기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부터 두뇌가 비어있는 듯한 여성으로 남성에게 통용된다.
완전히 마릴린 먼로의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바쳐진 위 장면은 아예 남성들의 시선 자체를 극 내부에 삽입시킨다.

30년대 프레드 아스테어와의 뮤지컬 영광 시대를 이끌었던 진저 로저스는 50년대 이후 정극에 몰두하는데,
이 작품 당시 그녀도 이제 40대 여배우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캐리 그란트와 진저 로저스의 지난 항로를 회상한다면 영화 자체는 또다른 회복과 염원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다.

본편에 등장하는 두 여성배우인 진저 로저스와 마릴린 먼로는 혹스 영화속에서 특징적인 여성 역할과는 달리
 그저 남성에의 사랑을 갈구하고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면서 퇴행하거나 백치로 남는 존재로 다루어진다.
원숭이가 만든 시약을 우연히 마신 부부가 유아기로 퇴행하여 서로에게 장난을 걸고 티격태격하는 에피소드를
 마릴린 먼로와 캐리 그란트의 데이트 이후에 진저 로저스의 변신 그리고 두 사람 모두의 변신으로 3단계로
 나누어서 제시하는데, 각 단계는 충분히 희극적이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그리 무거워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일 분이지, 현재와 미래를 흡수한 과거로의 성찰이 담긴 여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 단게의 에피소드 중 그나마 가장 실소를 금할 수 없게하는 지점은
 캐리 그란트가 어린 시절부터의 연적으로 설정되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아메리카 원주민이 머리 가죽 벗기는 것을
 실제로는 그 머리 자체를 모호크족의 헤어 스타일로 변신시키는 일종의 백인 남성에의 복수를 가장할 때이다.
여기에 원주민 분장을 한 백인 꼬마들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다소 반 역사적일 수 있는 지점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단지 소년기로의 퇴행 자체가 그리 생산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못함을 드러내는 희비극일 수도 있다.

원숭이가 시약을 만들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캐리 그란트가 아니라 그의 조수역을 맡은 대머리 사내이다.
그를 위 장면에서 나무에 묶여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남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지만,
캐리 그란트는 여기서 전혀 전문가스럽지 못한 캐릭터로 등장하여 끝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내일 뿐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동원되는 것은 다소 놀랍게도 아기인데,
혹스는 작정하고 관객에게 왜 이 다정한 부부에게 아기가 존재하지 않는지를 묻게함으로서
 이 장르의 훈훈한 사랑의 이면은 기실 불임이라는 잔혹한 동화와 맞물려있음을 고백한다.
즉, 이들 사이에 오가는 스크루볼 코메디의 말들은 어쩌면 철저히 닥쳐올 상처를 가리기 위한 방패인 것이다.

마지막 정리는 수미쌍관으로서 다시 무도회에 가려는 부부의 대화로 이어지는데,
그들은 결국 아름다운 키스로 사랑이 담긴 젊음으로 관객에게 확인받을 수는 있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엔딩 처리된다.
그들이 집 밖으로 나갈 때는 극 중에서 시약이 있는 실험실에서거나 그것을 마신 채로의 외출일 때 뿐이다.
집 안에서만 가능한 사랑의 확인 그리고 외출 금지라는 족쇄는
 이 경쾌한 젊음으로의 변신 상황극을 쉽사리 한여름밤의 꿈 정도로 한계짓게 만든다.


 "몽키 비즈니스"는 퇴행성 젊음병이라는 진단서가 배부되어도 좋을 가난한 관념의 소산이면서
 결국 그 젊음이 도착한 장소에 아기를 배치시킴으로서 오히려 출산의 부재를 암시하는 실험실의 불임극이다.
29 불량아이
고맙습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11 아라태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