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포 (The Pawnbroker , 1964) Sidney Lumet DVDRip.XViD - SMF 23.980 F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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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The Pawnbroker , 1964) Sidney Lumet DVDRip.XViD - SMF 23.980 F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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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The Pawnbroker , 1964)
 
 


 
 
부조리한 세상과의 거리두기가 진정으로 가능한가? 
전당포 (The Pawnbroker ,  1965년)
 
드라마  /  미국  /  116 분
감독 : 시드니 루멧
출연 : 브록 피터스, 로드 스타이거, 하이메 산체스, 후아노 헤르난데즈, 찰스 디어코프, 제라르딘 피츠제럴드
 
 

 
영화미학을 구성하는 기본공식에 '형식은 곧 내용'이라는 불문율이 있다. 사회파 감독 시드니 뤼메의 영화 <전당포 The Pawnbroker; 1965년>는 이러한 공식이 제대로 작품 속에 구현될 때 어떤 효과를 빚어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영화 전체에 걸쳐 계속 반복 사용되는 '무의식에 호소하는 화면편집'(subliminal cutting)기법은 주인공이 고이 간직하고픈 추억과, 반대로 어떻게든 잊고 싶은 악몽 같은 체험을 일상의 현실과 나란히 뒤섞어 놓음으로서 관객 스스로 해당 화면과 장면들 간의 관계를 유추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아주 짤막하게 삽입되어 무슨 내용인지 쉽사리 파악할 수 없어 관객의 호기심만 유발한다. 그러나 이후 같은 이미지가 반복 사용된다. 더욱이 뒤로 갈수록 삽입되는 영상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마침내 관객은 주인공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맥락을 완전히 파악하게 된다. 영화 <전당포>는 이 특이한 기법을 통해 관객의 능동적인 사고 작용이 효과적으로 촉진될 수 있음을 입증한 모범적인 사례다. (물론 동일한 기법을 영상광고 텍스트 안에 삽입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구나 광고마케팅 메시지를 영화 내용 안에다 무의식에 호소하는 화면편집 방식으로 무작위 삽입하는 것은 미국에서 불법화되어 있다.)   
 
도입 시퀀스에서 몇 분 넘게 지속되는 느린 화면(slow motion)의 플래쉬백(flashback;  과거회상)은 주인공 나저맨(Nazerman)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희미한 편린들을 재구성해 관객에게 미리 보여준다. 다음 장면에서 영화는 갑자기 몇 십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늙은 주인공이 누워 일광욕하고 있는 모습을 비춘다. 2차대전의 전화(戰火)에서 유태인이란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나저맨으로서는 전쟁 미치광이들이 들끓는 곳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폐허의 유럽으로 가족여행을 권하는 처제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그 모진 굴욕과 고통,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도저히 삭여지지 않을 것만 같던 분노를 이제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겉으로는 그런대로 녹여버린 듯 보이는 이 전직 대학교수는 미국에 와서도 '생존에의 집착'이란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직 돈만을 아는 수전노로 전락해가고 있다. 나비를 좋아했던 그의 아들이 수용소행 강제 탑승 열차 안에서 탈진으로 쓰러져 차 칸에 짐승처럼 빽빽하게 채워 넣어진 사람들의 다리 밑에서 깔려 죽어갔고, 아내는 수용소에서 몸을 더럽힌 끝에 끝내 세상을 등진 마당에 나저맨에게 삶의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들먹인다는 짓 자체가 적반하장일지 모른다. 친구의 장인이 공박하듯, 그는 몸뚱어리가 살아남는 대신 정신은 죽어버린 셈이다. 
 
 
나저맨이 자신이 운영하는 전당포로 출근하는 장면은 도시의 황량함과 뒷골목의 썩은 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당포 안에서 일하는 그를 둘러싼 철망은 일종의 이중적인 비유 같다. 즉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이 세상으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보호막인 동시에 그의 영혼을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게 가둬놓는 우리다. 이런 비유를 더욱 확장하면 그가 출퇴근하는 전당포 자체가 그를 위한 보호구역이자 감옥이다.   
 
나저맨이 대하는 고객들이 표출하는 각양각색의 모습은 가증스러움을 넘어서 애처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대화에 굶주린 나머지 한 중년 남자가 전당포를 애타게 드나드는 풍경은 리즈먼의 지적처럼, '고독한 군중' 즉 군중 속에서 부유하는 원자화된 인간의 단적인 예다. 오직 생존 이외에는 관심 없던 나저맨은 어느 날 자신과 결탁하고 있던 암흑가 보스 '로드리게스'로부터 그 동안 자신이 받아온 보수가 바로 로드리게스가 운영하는 매음굴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고뇌에 빠진다. 나저맨의 혼란스런 심리상태는 그의 아내가 수용소에서 능욕당하는 플래쉬백(이 역시 무의식에 호소하는 화면편집으로 표현된다.)과 교차된다. 그는 방어적으로 살아온 자신이 어느새 또 하나의 착취자로 변모해버렸음을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돌연 그는 자신이 직면한 진실로부터 달아나려한다. 나저맨이 로드리게스와 관계를 끊으려들자, 로드리게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당신이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일해 왔다면, 그것은 당신이 세상의 모든 악과 현실을 애써 외면해온 데 지나지 않아."
 
역설적이지만 로드리게스의 말은 나저맨의 자기변호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나저맨은 결국 세상의 악을 외면한 채 전당포라는 자기만의 성 안에서 일신의 안녕을 도모한데 불과하니까. 방황하던 그가 찾아간 곳은 일전에 알게 된 '마릴린'이란 중년의 고독한 여인이 사는 아파트.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아파트 테라스 난간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삭막하고 기하학적인 디자인들은 그들의 을씨년스런 대화를 한층 강조한다. 거기서 그는 그녀가 진실한 공감을 갖고 자신을 받아들여 위로해줄 만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 허탈한 심정으로 대문을 나선다. 이러한 정황은 마릴린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 2차대전 당시 유태인들이 겪은 악몽 같은 처절한 상처를 미국사회가 남달리 치유해줄 능력이 없음을 암시한다. 흔히 '어메리칸 드림'으로 포장되는 미국 땅에 건너와서도 나저맨은 생존을 위해 로드리게스와 결탁하지 않을 수 없고 매음굴에서 나오는 돈을 받아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감독은 애초부터 아무 것도 더 나아질 게 없었던 환경에다 나저맨을 들여놓은 셈이다.  
 
 
나저맨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당포에서 점원으로 새 출발한 암흑가 출신 청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 역시 나저맨과 공통점이 있다. 남미 계통의 이민 세대인 그는 어머니의 격려 아래 절박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합법적인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죽는다. 나저맨은 죽어가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다시 한번 분노에 치를 떨지만, 단지 그뿐이다. 영화는 나저맨이 전당포를 닫고 쓸쓸히 귀가하는 광경을 보여주며 막을 내린다. 귀가하는 나저맨의 겉 표정은 어찌 보면 담담해보이기까지 한다. 속으로는 곪을 대로 곪아있는 모순을 감춘 채...   
 
<전당포 The Pawnbroker>는 문제의 해결은커녕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쏟아놓은 채 끝난다. 이런 식의 결말은 권선징악의 화끈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길지 몰라도 감독으로서는 상당히 충실하게 리얼리티를 반영한 결과라 볼 수 있다. 나저맨을 에워싼 환경은 계속해서 그를 압박해온다. 전당포라는 탱크도 결국은 양철로 만들어진 임시변통에 불과하다. 그는 전당포 우리 안에 갇힌 채 주먹을 휘두르는 로드리게스에게 그저 턱을 삐죽 내밀 수 있을 뿐이다.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다. 여기서 어떤 인위적 해결책을 제시하려들면 들수록(마치 <귀여운 여인>이나 <사관과 신사>처럼) 리얼리티는 훼손될 것이다. 억지춘향으로 꿰맞춰 해피엔딩으로 타협하고 나면 관객은 당장 극장 문을 나설 때는 잠시 개운할지 모르나 몇 발짝 더 걸으면서 찜찜한 여운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눈을 감는다고 현실의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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