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Pygmalion (1938) 안소니 애스퀴스, 레슬리 하워드 감독 레슬리 하워드, 웬디 힐러 출연 버나드 쇼 원작 코미디
홍두깨님 릴 2CD 자막 씽크 조정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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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엿듣기의 총체성
25년 후에 제작된 <마이 페어 레이디>와 몇몇 장면에서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다.
언어라는 에덴 동산에 대한 우화에 끝내 어떤 성적 긴장감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부르조아적 은닉을
두 편이 공유할 때 신데렐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여기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페미니즘의 시간이
부재하다. 말하자면, 2차 제국주의 전쟁이나 냉전 시기 모두에서 여전히 대중 문화는 보수성의 독신을
강권하는 조류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본편이 유아를 등장시키지 않음에서 최소한의 격식을 본다.
오프닝이 저자거리 시장에 배당되었음은 오히려 엿듣기의 퍼포먼스보다 강렬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카메라가 인물을 따라 이동할 때 그녀가 영화 내외적으로 상품이라는 것을 명시함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품은 필히 포장을 필요로 하고, 이로서 실재 사용가치를 넘어서는 교환가치를 획득한다.
교환가치는 결코 실재일 수 없고 바로 그같은 이유로 외면의 찬란함은 대중의 지적 한계 너머에서
외재화될 수 있다. 이를 '명품'이라고 칭한다면 본편의 명품은 표준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엿보기가 영화의 시원적 본성이라면 이에 엿듣기를 부가하여 타자화된 대상을 이상형으로 조각하려는
남근적 욕망은 일종의 인형놀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본편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정확히 그 반대편에
인물이 언어 교육 도중 꿈에서조차 남근적 지시물인 인형의 감시를 받는듯한 숏을 투입함으로서
오히려 이를 반역적으로 쾌락화한다. 여기에 인물이 거주지 방에서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 등을
탐구하는 숏이 추가될 수 있다. 남성의 걸작이 소유권 아래로 귀속될 때 여기에는 실내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