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L'ami.de.mon.ami.1987. 에릭 로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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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L'ami.de.mon.ami.1987. 에릭 로메르)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660223
파리 근교 소도시의 시청에서 일하는 블랑쉬는 어느날 식당에서 레아라는 여자를 만난다. 둘은 곧 친구가 되고 레아는 애인이 없는 블랑쉬에게 남자친구 파비앙의 친구 알렉상드르를 소개시켜 준다. 하지만 레아가 휴가를 떠난 사이, 블랑쉬는 알렉상드르가 아닌 파비앙과 사랑에 빠진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하게 된 블랑쉬는 심리적 혼란으로 힘들어하는데…


 

Comments

1 June™
  오~ 드뎌 올리셨네요 ㅎㅎ;; <BR>수고하셨습니다.^^*(오철용님 먼저 못올리신 자료는 삭제요^^;;)
24 오철용
  기어이 올리긴 했는데...<BR>어쩌다 보니 올라갔군요.<BR>안올라간 이유는 특별검사를 임명하거나,<BR>국정감사를 통해서라도 밝혀야 할것이며...^^<BR>아래 두 글은 자료실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BR>댓글 남기신 회원님들께 결례가 되는 일이겠으나<BR>내일쯤 삭제하겠습니다.<BR><BR>혹시 파일명에 한글이 들어있음 안올라가나요?<BR>아시는 분 좀 알려주세요~.
1 June™
  아뇨 올라가지는데..간혹 ie7이 말썽을 일으켜요^^;;<BR>전 일부로 영어로만 올려요...딴분들이 간혹 다운 안된다고해서요 ㅎㅎ;;
1 우울증오리
잘 보겠습니다
S 컷과송
2019. 7. 13. 감상


신상옥의 1961년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화자는 소녀 옥희다. 오렌지숲님의 의견에 따르면
영화는 옥희의 1인칭 시점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해당 영화의 모든 시퀀스가 옥희의 시선 하에
놓여있는가는 의외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환영적 지배가 작용하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영화의 서사 및 이미지 전체가 이미 옥희의 욕망 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
어머니와 아저씨의 단독 시퀀스 및 할머니의 존재까지도 옥희의 욕망과 징벌이 작용한 결과가 된다.

이와 관련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엘렉트라 컴플렉스, 매맞는 아이 등의 환영 이론으로 호출하는
것보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와 연관할 때 흥미로운 점은 '사랑방'이라는 전통 호칭의 변용이다.
 '사랑방'은 직설적으로 섹슈얼리티의 공간으로서 여아의 남근 결핍과 획득의 대체 환상 공간/영화다.

이와 관련 본편에서 유일하게 자기만의 '집'을 소개해주는 이가 블랑쉬라는 점은 전술한 '사랑방'과
절합되는데, 옥희의 '사랑방'이 접근금지의 공간이라면, 블랑쉬의 그 곳은 개방되고 두 명의 인물이
그 곳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특히, 초반부 레아는 블랑쉬의 소개에 의해 해당 공간의 전면,
후면의 바깥 풍경을 관객에게 시각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블랑쉬의 또다른 욕망된 자아일 수 있다.

엔딩에서 블랑쉬-레아가 서로 다른 색감의 옷, 알렉상드르-파비앙이 동일한 배색의 의상을 착용할 때
이를 블랑쉬의 공간과 연관한다면 본편의 모든 시퀀스는 순식간에 옥희의 '사랑방'과 등식화된다.
말하자면, 이에는 우정, 사랑이라는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블랑쉬의 공간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본편이 4인(혹은 5인) 이외의 어떤 다른 세계와 맥락이 개입되지 않아야할 사유인 것이다.

다른 장면을 빌자면 테니스장에서 한 명의 선수만을 포착하고 반대편 선수를 프레임 밖으로 배제함은
본편에 존재하는 것이 관계가 아닌 단독자의 건넴(테니스에서의 서비스 동작)임을 지시함과 같다.
이에 블랑쉬의 집은 어떤 곳인가를 첨가할 필요가 있다. 전술한 전경과 후경은 포니 보이님의 지적처럼
완전히 대비된다. 어느 쪽이 블랑쉬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무익하고, 오로지 그 집에 블랑쉬가 과정으로
거주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 집에 유일하게 알렉상드르가 방문하지 않음을 기억함이 의외로
유익할 수는 있다. 혹은 레아의 시선에서 먼저 포착된 전경이 신도시의 건물이라거나 영화의 첫 장면이
건물 전면이라는 점이 역시 유용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거기에 블랑쉬가 있고 윈드 서핑 등의 야외
공간에 다른 블랑쉬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이항대립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과정이 된다.

누가 누구의 연인이 되는가? 그 과정에서 예의가 있었는가? 등의 섹슈얼리티 도덕이 현 체제의
이데올로기의 효과에 불과하다면, 블랑쉬(공간)를 통해 오직 흐름으로서의 과정이 있을 뿐  통일된
폐쇄성을 완결하려는 구조에 저항함이 적확한 내심일 수 있다. 이는 블랑쉬가 건물 복도에서 다른
여성과 대화할 때 이를 한 프레임 내에서 롱테이크로 촬영하기를 거부하고 인물 각각의 프레임 혹은
컷을 통한 장면을 붙임으로서 단절된 지속을 선택할 때 반증된다. 오직 하나의 직선으로서의 길이라는
체제의 도덕이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거나 미로같은 상가의 우연에서 발견되듯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흐름'이라는 비본질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친구는 그러므로 거기 있고 동시에 없다.
이것이 블랑쉬의 방 내부가 백색의 공간으로 특별한 가구 등이 배치되지 않아야할 이유인 것이다.
S rayphie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