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령(降靈 / Se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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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降靈 / Se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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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호러타임즈에 실린 리뷰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자신의 손을 떠나서 좌지우지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영화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영화를 보고서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다.

준코(후부키 준)는 죽은 자를 보는 능력과 물건을 통해 그 임자의 생사 여부나 위치 등을 투시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자신이 원해서 가진 능력이 아니라 타고난 능력이다. 보통 사람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뛰어난 능력이라고 감탄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준코는 보통 사람들과 섞여 살지 못한다. 이유야 뻔하다. 사람이 자신과 다른 무언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배타적이던가.

그런데 준코를 구별시키는 그녀의 비범함에 한 가지 요소가 더 부여된다. 유괴되었던 여자아이가 도망치면서 엉뚱하게 그녀 남편인 카츠히코(야쿠쇼 코지)의 커다란 짐 가방 속으로 숨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경찰에 쫓기던 유괴범은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들고 아이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경찰은 이런 저런 끈을 통해 준코에게 그 아이의 행방을 묻게 된다. 속시원하게 얘기해줄 수도 있으련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준코는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정말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라 할 수밖에 없다. 준코와 가츠히코는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인생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한다. 마치 아이들이 지나가던 개미들 앞에 커다란 돌이나 장애물들을 던져 놓음으로써 이리 저리 길을 헤매게 된 개미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런데 그런 불가항력적인 요소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영화에서 가츠히코의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음향에 녹음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쓰러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이상한 소리는 가츠히코에게 그저 잡음에 불과했지만 그의 동료에게는 영혼의 목소리처럼 들렸던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듯 하지만 이는 곧 사람의 인생을 바꿀 불특정 요소들은 흔치않게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가츠히코의 말을 조금 인용해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에게 정해진 운명이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주인공들은 결국 그 굴레에 얽히고 만다.

<링>만큼 무서운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만들었기 때문에 <강령>은 공포 영화의 형식을 취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다른 작품들로 미루어 봤을 때 공포라는 장르가 그에게 낯선 분야는 아니다. 그러나 <링>을 의식한 탓인지 혼령의 모습이나 아이의 모습에서 '사다코'의 흔적이 엿보인다. 외형적인 어떤 특징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지만 '<링>만큼 무서운'이란 일종의 제약이 어느 정도 부담이 되었던 듯 하다.

<강령>은 시기적으로나, 그 안에 든 생각의 색깔 면에서나 감독의 다른 작품인 <큐어>와 <회로>의 사이에 위치한 작품이다. 현대사회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던 것이 <큐어>였고, 그나마 일말의 희망을 내비친 것이 <회로>였다. <강령>은 <큐어> 쪽에 가깝다. 현대인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여전히 우울하다. 카츠히코가 죄의식으로 인해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했으니 적어도 인간의 양심에 대한 희망을 보인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카츠히코의 그런 행위는 이 영화의 주제와 무관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그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과정인 것이다.

그래도 주제와 굳이 연결시켜야겠다고 한다면 포기라고 보면 된다. 아이가 카츠히코의 옷에 손도장을 찍었을 때 그는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느끼고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것이다. 결국 감독의 생각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올가미에 걸린 듯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 그들이 빠져나갈 길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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