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개척지(The Last, Frontier, 라스트 프론티어,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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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개척지(The Last, Frontier, 라스트 프론티어,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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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시계있고님 요청작입니다. 

안소니 만의 덜 알려진 웨스턴인데, 짭짤합니다.

빅터 머추어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영화입니다.


야만과 문명의 충돌?은 인디언과 백인만의 것이 아니라,

백인 사이에서도 존재합니다.

주제가 재미나요. 역사극도 아니고, 지나치게 연애가 들어가지도 않아서

보기에 딱 적당하고, 시원시원합니다.


느닷없이(?) 앤 밴크로프트가 조신한 여인으로 나옵니다.

너무 젊어서 언듯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네요.


가슴이 서늘한 감동을 주는 건 아니지만,

진정한 야만과 문명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상은 구글드라이브가 차기 전까지 공유합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6 블랙JO
고전 서부극 재밋게 보이는군요...고맙게 잘 보겠습니다^^;
S 토마스모어
이 배우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영화일 것 같습니다  '황야의 결투'의 닥 할러데이 역할은 정말 영화역사상 5손가락에 꼽을 미스캐스팅의 대표적 사례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적역일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잘 보겠습니다.
19 큐담
수고하셨습니다.
37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4 발타자르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37 Rookie
감사합니다
안소니 만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일본의 <키네마순보 세계인명사전>에 나와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즉 '강렬한 개성은 부족하지만 할리우드 오락 노선의 훌륭한 계승자'라는 한심한 평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된 영화잡지의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다들 <키네마순보> 영화 순위 너무 맹신하지 말기를...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한 잡지가 아닙니다).

안소니 만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저평가된 감독 증 하나입니다. 그가 그토록 무시당한 데에는 스릴러, 웨스턴, 신화라는 당시까지만 해도 비평적 존경심이 부족했던 이 세 가지 장르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는 늘 장르를 전문으로 하는 감독, 그 중에서도 서부극을 만드는 감독을 소홀히 대했습니다.

예전에 국내에서 꽤 알아주는 영화평론가 한 명이 존 포드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존 포드가 감독조합 긴급회의에 참여한 (누구나 다 아는) 일화를 거창하게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 할리우드는 매카시즘의 선풍으로 좌익 공산주의 영화인을 추방하려 했고 거기에 앞장 섰던 사람이 세실 B 드밀 같은 감독이었습니다. 존 포드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싶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는 존 포드입니다. 서부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죠'로 시작하는 명연설을 합니다(이 자기 소개의 서두는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이 쓴 <존 포드>의 1장 타이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평론가가 뭐라고 하느냐면 존 포드는 서부 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자기를 '서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저런 무식한 녀석도 영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강연을 하는구나,하고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존 포드의 저 말은 '저는 고작 서부영화 만드는 사람입죠' 정도의 의미로 당신(세실 B 드밀)과 같은 급이 안되지만 따질 건 따지겠다,라는 뜻으로 한 말이거던요.

착각해서는 안되는게 서부극을 만드는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감독 취급을 못받았던게 현실입니다. 에드원 포터의 <대열차 강도>(03)가 만들어진 이후 수많은 서부극이 나왔지만 언제나 B급 장르물로 멸시당했고 그나마 대중들에게 대접을 받기 시작한게 <역마차>(52)가 나오고 부터입니다.

지금이야 할리우드의 서부극, 일본의 찬바라 영화가 평론가들에게 재평가 받는 것이지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존 포드에 대한 최고 권위자 태그 갤러거도 성인이 될 때까지 존 포드라는 이름을 몰랐다고 합니다. 하찮은 서부 영화 장르의 감독 이름을 외우고 있는게 이상한 사람 취급 받던 시절이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 존 포드가 사람 취급 받을 수 있었던 건 서부극 때문이 아니라 <밀고자>나 <분노의 포도> 같은 작품 때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종종 현재의 관점으로 과거를 왜곡해서 바라보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안소니 만은 그런 장르물을 만드는 감독이었으니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올 수 없었지요. 이 감독을 알아본 사람은 (늘 그렇듯이) 프랑스인들이었습니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지면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가 열광적인 지지를 한 것입니다. 고다르는 종종 안소니 만을 '슈퍼만(Supermann)'이라고 불렀습니다.

1955년에는 자크 리베트가 니콜라스 레이, 리처드 브룩스, 로버트 알트먼과 더불어 안소니 만을 ‘전후 할리우드 4대 감독’ 중 하나로 리스트에 올립니다.

그 뒤 프랑스에서는 서부극에 대한 단행본 책이 나오고 안소니 만의 작품을 하워드 혹스와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의 아름다움은 우아한 고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번갯불처럼 지나가는 로맨티시즘을 찍었다는데에 있다’라는 평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점차 영어권에서도 안소니 만에 대한 평가가 프랑스 평단과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프랑스 영화 비평에 영향을 받은 앤드류 새리스가 쓴 <아메리칸 시네마>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29년부터 68년까지를 미국 감독을 다루면서 만신전에 오를 등급부터 잡동사니까지 총 11등급으로 분류를 합니다.

안소니 만은 이 등급에서 만신전 바로 다음 등급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킹 비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라울 윌쉬, 프랭크 카프라 등과 같은 레벨입니다.

흔히 안소니 만의 최고작은 일곱 편의 서부극을 꼽습니다. 셈을 하면,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 서부극 다섯 편, 즉 <윈체스터 73>(50), <분노의 강>(52),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53), <운명의 박차>(53), <머나먼 서부>(54)에 여기다 게리 쿠퍼가 나오는 <서부의 사나이>, 빅터 마추어 주연<라스트 프론티어>를 포함한 것입니다. 그리고 <낙동강 전투 최후의 고지전>(57)과 <엘 시드>(61)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그의 역량은 서부극에서 극대화되는데 서부극 형식에서 독자적인 테마의 개발했다는데 있습니다. 안소니 만의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세트가 아니라 현장 촬영에서 발견되는 지형입니다. 오늘날 무시된 장르를 지형학적으로 발굴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업적이 있습니다.

시각적이고 공간적인 지형이 도덕성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유념해서 보면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장 뤽 고다르는 <서부의 사나이>에 대해 글을 쓰면서 '각각의 개별적인 쇼트는 안소니 만이 서부를 재창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라고 상찬하였습니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은 급진적이면서 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의 서부극은 존 포드만큼 중요합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장르를 어둡게 하여 비극적인 세계를 창출했으니까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자> 같은 작품은 무엇보다 안소니 만의 서부극에 기댄 작품입니다. 현대 서부극은 사실 존 포드보다 안소니 만의 작품과 훨씬 유사합니다. 전후 서부극의 주요 인물로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할 인물이지요.

이 작품 <라스트 프론티어>를 만들 때인 1955년은 (54년부터 찍었던 <머나먼 서부>까지 포함) 네 편의 영화를 찍었던 해입니다.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안소니 만의 가장 지루한 서부극'이라는 혹평도 있었고 감독 스스로도 제작사의 간섭이 너무 심해 실패한 기획이었다,라고 자평을 했던 영화지요.
하지만 다시 보면 이 영화가 그렇게 만만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내일 병원 진료가 있어서 먼 길을 가야하기에 올려주신 영화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위대한 안소니 만 감독의 영화를 잊지 않고 올려주신 umma님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6 업타운
감사합니다
3 이면발
고맙습니다 ^^
GIVE 5 MP 33 스피리투스
고맙습니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30 하얀벽돌
자막 제작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6 하마다네
수고하셨어요^
14 푸른눈
수고하셨습니다
22 시간의항해
감사합니다.
23 까마귀
고생 많으셨습니다~
1 구라파덕
감사해요
10 김이장
감사합니다
10 포그선장
감사합니다
7 Atilla
수고하셨습니다
영문자막을 대체하겠습니다^^
24 Crush
감사합니다.
14 풀잎이
잘보겠습니다~
GIVE 3 MP S 반딧불이™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18 redondo
빅터 머추어 주연작 정말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3. 12. 4. 감상

영화사 1076 // 안소니 만 6
운명의 박차 (The Naked Spur) 195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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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오르는 곳이 평지다

영화사 내에서 오른다는 것은 단순히 캐릭터의 분열된 심리나 생물학적 긴장감 등의 표면적인 기표로만 상정되지 않는다.
이는 필연적으로 수직성에 기반하므로, 절벽 등에서 의심스러운 틈새를 지반으로 하여 상승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치장되는데, 이때 카메라가 익스트림 롱 숏으로 물러날수록 인물은 작은 점처럼 거대한 자연의 직선 아래 기탁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자연이 극내 서사에 의해 남근화된 물성으로 지정될 때 발생한다. 그 경우 영화는 순식간에 인물의
성장 신화로 비화하여 사회화의 해피엔딩을 유도한다. 아버지가 되는 길은 결코 녹록하지 않고, 정착은 간단할 수 없다.

본편은 그간 안소니 만이 반복해온 웨스턴의 또다른 공식성으로서 앙각과 부감을 오가는 수직의 오름과 떨어짐을
무대로 한 바, 그 중 전작 <격노>에서 원주민들과 백인 남성 집단 간의 공성전에 가까운 대결이 원주민들이 점유한
암벽의 정점에 백인 집단이 발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종료됨으로서 이들이 그 위치를 점유해서는 안된다는 불허의
묵시를 드러냈다. 이에 반해 본편의 초반부 동일한 절벽 대결에서 인물은 1차 시도에 실패하고, 다른 이가 이를
대체한 이후에야 평탄한 길로 조력의 부차적 지위에 머문다. 이같은 부실은 이후 다리 부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다.

수직의 점거는 결국 동굴 속 좁은 통로에서의 추격을 통해 치유받는다. 마지막 대결에서 인물은 수직 상승에
성공하고 박차를 던져 적대자이자 자신의 타자화를 항거 불능하게 한다. 여기에 일종의 가족 회복이자 공동체의
출발점으로서 딸과도 같은 여인과의 결합이 예정된 것은 남근성의 위력에서 법칙화된다. 문제는 그 순간에
현상금/시신의 자본의 기반보다는 새로운 정착을 위한 탈주를 시도함에 있다. 수직성의 남근화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는 불협화음의 환타지에 가깝다. 이를 오롯이 50년대초 미국 중산층의 성장과 연결해야할지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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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1077 // 안소니 만 7
글렌 밀러 스토리 (The Glenn Miller Story) 1954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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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영원한 정착의 꿈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오케스트라 등을 중심으로 소녀 등을 기호화하여 해피 엔딩의 긍정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의 공격은
30, 40년대를 이어 50년대에 대중음악의 유명인사로 연계된다. 이 하위 장르는 특정한 적, 가령 자본을 대표하는 극장주
등이 진정한 '사운드'를 갈구하거나, 가족 회복을 완성하려는 인물과의 대결 구도를 긴장감의 흥행 요소로 삽입하려는
규칙성을 발산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동화적 기조를 유지하는 장르의 특성상 과잉된 폭력성은 가능한 제한된다.
본령은 세계가 안정화될 수 있으며 이 평화의 기제로서 음악은 매우 미학적임을 거대저택의 합주로 완성시키는 데 있다.

서부극에서 잠시 이탈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안소니 만 조합이 왜 뮤지션 일대기를 선택했는가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의
의문사가 해제되지 않은 지점이 작용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본편이 시종 지속하는 분위기가 몇몇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는 대부분 기후에 의한 차량 파손이나 악단원의 부상 등의 형식적 제약에 불과하다) 특정한 적대자가 설정되지 않은
음악인으로서의 성공을 유지하는 데 비해, 결말부 지극히 이질적인 특수효과 영상의 삽입이 전체 기조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본편은 인물의 죽음인 비행기 추락을 굳이 2회에 걸쳐 어색하게 전시함으로서 더욱더 정서를 무산시킨다.

이를 오프닝의 인물과 전당포 후경에 상승하는 철도와 연관시킬 수 있다. 프레임은 노골적으로 전차를 배치했음을
다른 단락에서 하향하는 모습으로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인물의 음악 여정이 상저가 있음을 지시하는 것을 넘어서
전술한 추락의 복선으로 연결된다. 도서 전철이 항시 인물 상반신과 연계됨은 이를 반증하는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안소니 만의 웨스턴의 종점이 항시 정착지로의 안주와 선택임과 더불어 수직성의 점거 등을 상기할 때
본편의 결말부 추락 영상은 기이하다. 물론, 인물은 음악이 추락을 이겨낸다는 공연 실황을 지휘하지만, 결말에서
그의 죽음은 그저 라디오 방송과 아내의 응시하에 사진 등으로 제한된다. 이를 19세기와 20세기의 구분점으로
해제해야할지는 망설여진다. 하지만, 인물이 미국이 아닌 타지에서 죽음에 이른 것을 참고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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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1078 // 안소니 만 8
머나먼 서부 (The Far Country) 1954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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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정면은 법률이 될 수 없다

윌리엄 와일러와 존 휴스턴의 로이 빈 판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장르와 역사를 기술했다. 이에는 제국주의 전쟁 하와 베트남
침략전이라는 시대성이 반영되었다. 이같은 외적 맥락을 차치할 수 있다면, 로이 빈에게 남겨진 것은 남초적 법의 통제성이다.
( 본편에서 늙은 친구 배역인 월터 브레넌이 윌리엄 와일러의 <서부의 사나이>에서 로이 빈 판사였음을 상기해도 좋겠다.)
두 작품이 모두 이를 대중예술, 사실상의 무비 스타에의 매혹을 통해 추락과 복귀의 출구를 마련했음을 상기한다면, 본편은
이같은 할리우드적 접점을 배제하고, 남초에게서 사악함만을 추구한다. 본편에서 보안관은 무법적 1인 독재를 국경을 넘어서
확장시키는데, 이 때 방랑자는 유일한 대결구도로 배정됨을 개인주의적으로 거부한다. 공동체의 힐난은 개인적 손실 이후다.

이 지반에서 논점은 인물이 지기의 죽음과 자신의 부상이 아니라면, 공동체 혹은 개인적 복수라는 자리를 수행했을까이다.
본편은 이를 소도구를 통해 회피하는데, 인물의 말에 달린 작은 종은 친구가 선물한 것이며 그 자체로 지니는 소리의 물성이
인물과 관객을 각성시키는 고전적 형식성을 내재한다. 실제로 종소리는 그것을 경계와 침범으로 인지하는 적대집단에게는
이목을 집중시키는 비시각의 시각화로 지정되지만, 인물은 그 종소리의 방어를 통해 자신의 육체를 비정면화할 수 있다.
물론, 결말부의 최종 대결은 단지 이같은 소리와 시선의 불일치가 생성하는 이질감을 넘어 장르의 규칙성을 파훼시킨다.

본편에서 인물이 등장에서부터 총잡이로서 언급되거나, 친구의 대사로 직접적으로 정착이 아닌 방랑 기질이 고착화됨에도
영화는 서부극 장르의 고질이자 규정인 양자 대결의 긴장감을 어떤 장면에서도 삽입하지 않는다. 어떤 앵글에서든지 이같은
대결의 정당성이 유럽적 의식의 승계로서 재현되는 동안 양상이 다른 계급성이 유지되는 것은 또다른 보수성으로 기운다.
이에 대한 본편의 결말 결투가 밤과 소리, 은폐물과 노출이라는 1차전으로 균열된다면 결정적 붕괴는 보안관과의 대결에서
가로와 세로로 땅에 고착된 누운 자세에서 발생한다. 낮과 직립의 규정이 사라져야하는 이유에 대해 본편이 다음 장면에서
공동체의 참전으로 제지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개인주의가 권력의 횡포에 정면성의 대결이 불가함을 언칭함인지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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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1079 // 안소니 만 9
라라미에서 온 사나이 (The Man From Laramie) 195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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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프로이드 프로메테우스

인물은 노새를 몰고 들어선다. 그가 말을 타인에게 대여하여 타는 시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빌리는가 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상황의 변화에 따른 태도의 전환만큼이나 자격의 문제가 개입된다. 인물은 자신의 기나긴 복수를 안소니 만의
세계 속 전형처럼 시공을 초월해 지속하지만, 본편에서는 그보다 외부자로서의 장르적 혹은 사유적 조건이 더 핵심적이다.
이는 단순히 외부자의 공동체 정화라는 미제국의 전후 국제정치에서 개입에의 외교 합리화의 이데올로기적 측면보다
고전이 반복하는 혈연에서의 비윤리와 폭력 등으로 인한 보수성 균열에 대해 신적 개입에 가깝다. '라라미'는 하늘이다.

안소니 만의 또다른 장르에 배반하는 규칙인 장소의 이탈로서의 수직성이 본편에서도 반복됨으로서 평지가 아닌
절벽으로 시각화되는 산이 재귀한다. 하지만, 기존 세계와는 달리 본편에서 산은 신화적 공간으로서 돌변하는데,
외부자인 아파치 원주민에게 장총을 판매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장소로서 존재한다. 역사 정치적으로 확장하지 않고
극적 서사 구성으로서만 제한하면 아버지의 금기를 위반한 이에게 형벌은 예정된 바다. 하지만, 해당 징벌은
말로 자격을 변경한 타지인이 실행하지 않고, 금기의 혜택을 계약했던 집단이 단체로 행한다는 현상은 중첩적이다.

애초 아버지의 실기, 즉 육체의 향락에 기울어진 결혼이 눈의 실명이라는 신화적 징벌과 더불어 친아들의 폭력적인
미성숙과 더불어 유사 아들의 반역으로 이어질 때 이를 아버지가 '꿈 속의 남자'로 암시하는 방식은 프로이드적이다.
이미 아버지는 스스로 징벌의 근원임을 인지하고 이로 인해 신화의 본령인 혈연적 승계의 정당성이 결여될 것을
예지하고 있다. 결말에서 최초의 약혼자를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이 필요한 것은 이같은 맥락의 작용이다. 라라미의
개입자가 아버지의 친족녀와 맺어지지 않고 장르적 방랑자로 후면을 전시해야함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마을에
즉 혈연적 공동체에 후대가 기약되지 않음은 실상 장르/정치적으로 폐허를 선언한다. 신은 홀연히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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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1080 // 안소니 만 10
더 라스트 프론티어 (The Last Frontier) 195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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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돌아갈 곳이 있는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초반부다. 인물이 동료 2명과 사냥한 모피 등을 갑자기 나타난 원주민들이 강탈한다. 이 때, 중요한
지점은 이미 인물 등이 원주민들과 안면이 있거나 협약을 맺은 사이임에도, 그들의 수확을 빼앗아간다는 행위 자체보다는
원주민들 중 추장에 해당하는 자가 자신들이 밀려나갈 것을 예측하는 대화다. 이 때 언어는 영어가 아닌 원주민들간의
고유어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인물의 경험많은 동료가 '문명'이라고 말한 것과 조응한다. 이후 등장하는 원주민은
그들만의 의식은 있을지언정, 기병대 백인들을 공격하는 것 외에는 의미로 부각되지 않는다. 본편은 그들을 밀어낸다.

설사 본편이 <삼손과 데릴라> 등의 일련의 고대 사극으로부터 막 도착한 빅터 마추어가 연기한 인물의 내면으로
잠입하여 그의 야만/문명 이분법을 심리극화하고, 그것으로부터 표면과 내부를 반역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것을
주제화했음이 명백하다면, 이들 밖의 원주민들이 무엇이고 누구인지 본편은 당초 정치적으로든 미학적으로든
궁금해하지 않는다. 여전히 본편은 <아파치 요새>의 서부극 후예로서의 영토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웨스턴의 오래된 맹점이라기보다는 어디가 진정한 경계인지 고뇌하지 못하는 나태함에 다름 아니다.

여전히 인물이 나무를 올라가 정찰하거나, 요새의 전망대 등에서 결투하는 등 수직성을 고집함과 더불어 전작들과
동일하게 합법의 불합리와 폭력성을 정화시키는 외부자의 침입은 규정처럼 속행된다. 하지만, 본편은 그것이
문명 그 자체의 본질적 요인인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면서 후퇴와 설원 아래에서 스스로를 폐기시킨다.
무모한 아버지가 전사한다는 것이 그를 저지하지 말라는 상층부 지침과 반목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원주민,
요새의 불안 어디에도 응답하지 않고 인물에게 군복을 입히고 성조기에 경례한다. 정착을 두둔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