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에서 가장 기이한 지점은 죽음을 과잉되게 정서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장례식임에도
혹여 관을 운송한 수레가 훼손되지 않을까 망치질을 하느라 성당에 늦게 입장한다. 소년들을 중심에 두었음에도 흔한
장르적 감수성으로 몰입시키는 신파를 배제하고, 소년들이 왜 인간이 아닌 생물들의 묘지 십자가에 그토록 집착하는가에
대한 직선적인 서사적 쾌감도 생략한다. 관객은 결말부에 가서야 소년들이 조성한 십자가 무덤들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감정으로 폭발되지 않도록 과정을 소멸시킨다. 즉, 그 모든 생물 하나하나의 매장을 담아내기를 거부한다.
오프닝에서 소녀는 애견을 따라 작은 다리를 뛰어 건너고, 이를 만류하려는 부모는 다리 너머에서 총격당해 사망한다.
바퀴 하나가 빠진 마차를 이끌던 말이 폭주하는 것도 같은 순간이다. 하나의 '넘어섬'과 다른 하나의 '탈착'이 중첩된
작은 교각은 운명이라는 영화적 공간으로 변형된다. 마치 승계라도 받은듯이 질주하는 말은 결국 다가가는 농부에게
상해를 가함으로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한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으로서 농촌 마을의 부음은 여기까지다. 서사는
이후 탈영병과 이웃 여성 간의 연애를 간간이 발각시킴으로서 동력이 오직 '금지된 장난'으로 집중되는 걸 거부한다.
아들의 죽음- 장례식-딸의 옆집 남성과의 연애-막내 아들의 절도 징벌-고아 소녀의 정부 위탁이라는 사건 하에서
농부 가부장과 그 공간으로서의 집 내부는 결코 흔들지지 않는다. 이같은 정경의 필치는 자연주의라는 무감함에
근접한다. 적어도 소년이 바퀴벌레를 죽이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죽음은 시각 이미지에서 강아지를 묻는 행위가
소녀에게는 거의 유일할 정도로 기호로서의 과격함을 상실한다. 전쟁이란 극악한 국면은 죽음의 표식을 훔쳐
다른 죽음으로 이전시킴에도 기호로서의 역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올빼미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돌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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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기호의 죽음
본편에서 가장 기이한 지점은 죽음을 과잉되게 정서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 장례식임에도
혹여 관을 운송한 수레가 훼손되지 않을까 망치질을 하느라 성당에 늦게 입장한다. 소년들을 중심에 두었음에도 흔한
장르적 감수성으로 몰입시키는 신파를 배제하고, 소년들이 왜 인간이 아닌 생물들의 묘지 십자가에 그토록 집착하는가에
대한 직선적인 서사적 쾌감도 생략한다. 관객은 결말부에 가서야 소년들이 조성한 십자가 무덤들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하나의 감정으로 폭발되지 않도록 과정을 소멸시킨다. 즉, 그 모든 생물 하나하나의 매장을 담아내기를 거부한다.
오프닝에서 소녀는 애견을 따라 작은 다리를 뛰어 건너고, 이를 만류하려는 부모는 다리 너머에서 총격당해 사망한다.
바퀴 하나가 빠진 마차를 이끌던 말이 폭주하는 것도 같은 순간이다. 하나의 '넘어섬'과 다른 하나의 '탈착'이 중첩된
작은 교각은 운명이라는 영화적 공간으로 변형된다. 마치 승계라도 받은듯이 질주하는 말은 결국 다가가는 농부에게
상해를 가함으로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한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으로서 농촌 마을의 부음은 여기까지다. 서사는
이후 탈영병과 이웃 여성 간의 연애를 간간이 발각시킴으로서 동력이 오직 '금지된 장난'으로 집중되는 걸 거부한다.
아들의 죽음- 장례식-딸의 옆집 남성과의 연애-막내 아들의 절도 징벌-고아 소녀의 정부 위탁이라는 사건 하에서
농부 가부장과 그 공간으로서의 집 내부는 결코 흔들지지 않는다. 이같은 정경의 필치는 자연주의라는 무감함에
근접한다. 적어도 소년이 바퀴벌레를 죽이는 순간을 제외한다면 죽음은 시각 이미지에서 강아지를 묻는 행위가
소녀에게는 거의 유일할 정도로 기호로서의 과격함을 상실한다. 전쟁이란 극악한 국면은 죽음의 표식을 훔쳐
다른 죽음으로 이전시킴에도 기호로서의 역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올빼미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돌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