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8월, 란저우에 해방군이 입성하고 17살이던 허펭밍은 감격에 겨워 혁명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당시 창간했던 간쑤일보에 들어간다
1957년 5월 마오쩌뚱이 주창했던 '백화제방 백가쟁명'에 따라, 허펭밍의 신문사 동료며 남편 왕징차오가 간부들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
이후 역풍이 불어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면서, 왕징차오는 우파분자로 지목되고 허펭밍 또한 연루된다
결국 두 사람에게는 공직 추방과 오지 농장의 노동개조 처분이 내려진다
1960년 12월 왕징차오는 3천명의 수용자 중 2천5백명이 굶어죽은 악명 높은 지아비앙고 농장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1961년 허펭밍은 재심사를 신청해 신문사에 복직되지만, 1969년 다시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허펭밍의 집 거실에서 구술된 중국의 격동기를 살아간 한 중국 여성의 연대기
영자막을 옮겨 착오가 많을 줄 압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