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city님 자막 프레임변환 싱크만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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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이것이 미국의 신화다
본편에 대한 회피하고 싶은 가장 본질적인 도발은 왜 복귀되어야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단순히 수미상관의 기차에서 영화의 존재론을 저렴하게 수급하여 영화란 언제나 환타지이며
뮤지컬이야말로 매순간을 예고없이 가무 속으로 몰아넣어 에바 가드너를 시드 채리스로
이형변환시킬 수 있는 장소임을 강론하는 간편한 지점에서 벗어난다면, 50년대 뮤지컬이
왜 30년대 뮤지컬과도 같이 존속하거나 대중적 영광을 지속해야하는가하는 영화사회학적
논제가 발생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대응된 미국 중산층 사회의 부를같은 모범답안이 있다.
하지만, 이를 스탠리 도넌의 <사랑은 비를 타고>가 아닌 감독의 전작 <파리의 미국인>과
연결한다면 전술한 바의 논지를 연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세 지점에서 본편은 유럽을
배제하는데, 이는 문화계급적 구도로도 독해될 수 있다. 최초 제기된 공연 시나리오는
연극 연출자가 의해 '파우스트'로 둔갑하는데, 이 때 카메라는 문 틈의 훔쳐보기라는
미장센적 혐오를 통해 이를 거부한다. 여기에 파우스트의 '늙음'은 통용될 수 없는 바다.
'젊음'의 환원을 위한 각성제적 여성 신화에 본편이 기대지 않았다고 떳떳하게 주장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것은 영화 자체의 영생 혹은 뮤지컬의 필요충분 조건일 수도 있다.
물론, 60년대 이후 동 장르가 이에 대한 수정을 가하기 시작했음을 감안한다면 이같은
논의는 반증 가능하다. 더하여, 상대 춤은 발레이며, 인물 스스로 마지막 공연을 위해
판매하는 것은 유럽 화가들의 화폭이라는 점은 유럽/미국-고급/대중의 이분법에 대한
할리우드의 승전가를 느와르 장르의 변형을 통해 웅변된다. 결국 이같은 뮤지컬의
의기양양이 진실인가는 중요치 않다면, 이는 지금 여기가 50년대 미국임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