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없다 (Sans lendemain, 1939) There\'s No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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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없다 (Sans lendemain, 1939) There's No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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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오퓔스 감독의 1939년작 '내일은 없다'의 한글 자막입니다

불운한 결혼 이후로 파리의 시렌느 캬바레에서 일하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한 여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감독의 유려한 연출과 감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2차 대전 이전 연출한 작품 중 그의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자막은 필요에 따라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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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4 식식이
감사합니다.
S 궁금맨
고맙습니다.
7 ilvin
감사합니다
31 꺽지
고맙습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23 다솜땅
감사합니다..*^^*.
15 검은색이슬
감사합니다
18 바앙패
감사드립니다.
20 엽전
감사합니다.
29 시네시민
14 미스터쏸
감사합니다.
30 하얀벽돌
자막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14 푸른눈
수고하셨습니다
31 백두
감사합니다.
4 2132344
감사합니다.
19 큐담
수고하셨습니다.
16 하마다네
수고하셨습니다
20 pupukim
감사합니다
6 업타운
감사합니다
GIVE 5 MP 1 Merci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40 Daaak
감사합니다.
4 씨네시민
수고하셨습니다~
GIVE 10 MP 2 나그네로
댓글내용 확인
S 컷과송
2021. 12. 18. 감상

단  평 : 비가역성으로의 자해

본편에 감독 세계의 후속작들의 모티프가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은 표면적인 서사의 기호들을
지칭하는 편의에서 진술된 것이다. 그 중심에 1년 뒤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애수>와도 같은
여성 수난극이 배정된다면, 본편은 위 작품에 비해 본문 구성이 철저히 가역성으로의 시도로
충만하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게다가, 인물은 그 시간의 초침에서부터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당화되어야하는 가역성의 주체로서 전제되는 차별성이 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시대성은 없지만, 시간이 있고 그것이 공간의 이동으로 매섭게 편재된다.

오프닝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클럽 홍보를 위해 전시된 인물의 포스터인데, 거기서 그의 육체는
찬란하지만 동시에 거의 나체에 가깝다. 앞선 두 편의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은 가부장제의
강압 하에 비자발적 동의로 시선을 부여받아야하는 객체다. 이같은 운명론에서 매혹된 시선이라는
천형은 모순적인데, 보는 자/보여지는 자의 권력관계가 이분법으로만 해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는 자가 안전된 수동성이라면 보여지는 자는 능동적으로 시간/서사를 구축함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인물은 연인이 선물한 소년의 장난감인 기차에 탑승할 수 없다. 가역성을 부분적으로 성공한,
스스로는 시간의 역행에 탑승할 수 없음을 선택하는 인물은 '의사'의 환자로서 기탁될 수 없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플래쉬백의 지점에 극장-영화가 부여되고, 프레임이 남녀의 포옹으로
구성됨은 일종의 욕망 발현이다. 그 반대편에 보여지지 않는 죽음의 행위가 있다. 인물의 시신이
전작과는 달리 전시되지 않는 것은 가역성의 시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그것은 일종의 거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