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인명, 지명 등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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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카추카 50 Lucky Point!
추카추카 50 Lucky Point!
감사합니다.
단 평 : 패배로서의 세계
단지 거죽만을 더듬어서 누군가는 <신부의 아버지>의 솔직한 내심을 고백할 수도 있다.
혹은 <파리의 아메리카인>에서 부정되었던 인연을 교정하는 서사의 반역을 발견하게된다.
하지만, 본편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전혀 서사적으로 불가해하거나 이미지적으로 불신을
제기할 때 동의는 확연히 망설여진다. 소녀의 변화에 남성이 당혹해하고 거리로 나갈 때
이제까지의 미장센적 색감은 부재하고 어둠만이 휘감을 때 그것은 거짓을 지시한다.
어둠에도 분수대의 물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다고 감상하는 것은 기만이다. 기본적으로
인물이 구별되기 거북한 밤이 왜 필요한지 물을 때 이를 직선적으로 패배라고 지정함은
진솔하다. 부자연스러운 숙녀 수업에서 소녀가 취했던 반항이 한순간 전형성으로 추락하면
그 자리에 더 이상 이분법적 환타지는 존속되지 않는다. 애초 남성의 애정적 태세 전환이
소녀의 야생성에 근거한다면 왜 서사는 이를 진실화하지 않고 외려 남성을 돌려세우는가?
이 지점에 천착한다면, 본편은 어느새 전작 <디자이닝 우먼>이나 <열정의 랩소디>의
멜로 드라마적 비극을, 춤을 결여한 프랑스 출신 가수들의 노래만으로 위장한 채 하나의
연속성으로 50년대 중후반을 인지한다고 진술 가능하다. 냉전, 매카시즘 등의 외부적
요인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과잉된 파리의 색감들과 안정과 침묵의 스캔들로 얼룩진
부르조아에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본편의 입지가 순응자의 패배적 자각에 불과함을
고백할 때 그 미학적 근거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지루함이야말로 성숙의 근원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