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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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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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 소설이 원작이고,

브로드웨이 연극으로도 유명하고,

영화는 1992년도 게리 시니즈와 존 말코비치 버전이

아마도 가장 유명하지 싶습니다.

저도 이번에 번역하면서

이 1939년 버전을 처음 봤습니다.


소설 제목은 시에서 따온 거라고 하며, 

스타인벡 자신도 왜소한 체구였다고 IMDB에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극중 인물 '컬리'의 심정이 바로 스타인벡의 심정이었는지도요.


1939년에는 걸작이 너무 많아서 

이 영화도 작품상 후보였지만 수상은 못했습니다.

두 주연 배우도 호연이지만

뒷받쳐 주는 조연들이 다들 정말 탄탄합니다.

특히 컬리의 아내로 나오는 베티 필드는 적역입니다.


뒤져 보니 <생쥐와 인간>은

여러 번 영화화 되었는데,

그 중에 느닷없이 조지 시걸과 니콜 윌리엄슨이 나오는 버전도 있네요.

궁금하여 찾아봐도 물론 안보입니다만....^^



 
 

Comments

14 푸른눈
수고 많이하셨습니다
17 실룩이
고전영화자막 환영합니다.자막 작업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S dreammaker
고맙습니다.
GIVE 3 MP 16 TylerDurden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40 Daaak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1. 3. 9. 감상

단 평 : 거리를 두겠다.


오프닝에서 구름은 해를 가려 빛이 거기에 허락되지 않기를 예약하고, 땅에서는 토끼가 도피한다.
수미상관의 추격에서 전자가 왼쪽으로의 몰이라면 후자는 양방향 어디로도 출구가 배정되지 않는다.
수없이 무대와 스크린에 올려진 원작의 매혹을 배제한다면 카메라의 진정한 도의를 마주할 수 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안에서조차 최후를 보여줄 수 없다면 적어도 프레임은 온정이 깃들어야한다.
그러므로 누가 생쥐이고, 인간들인지 굳이 분간하고자 하는 관찰자의 편협한 권력을 들먹이지 말자.

두 인물이 농장주와 첫 대면할 때 그들 사이에 보이는 장애를 가진 늙은 남성의 단독 프레임의 삽입은
이같은 맥락에서 소중하게 포용하게된다. 원근을 이용한 세 사람의 높이의 경사마저도 마찬가지다.
물론, 과도한 음악과 카메라가 여성을 포착하는 방식의 비열함은 그다지 동의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성이 처음 프레임에 등장할 때 카메라는 하체의 다리와 상체를 각기 다른 프레임으로 절단시킨다.
관객이 여성의 신체를 전체로서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은 누군가가 폭력으로 실신한 이후에 도래된다.
그녀가 농장 인부들에게 다가갈 때 몸을 당에 밀착시키고 거대한 벨트 아래를 통과해야만 한다.

감정적 동요이자 위기로서의 정점은 늙은 견공을 안락사시키는 단락인데, 그 종점에서 카메라는
본편에서 흔히 사용된 어법인 물러섬으로서의 확장이 아닌 딥포커스 내부에 겹겹의 액자를 포개
내부의 모든 인물들과 공기를 신파적으로 데운다. 그 속에서 인물이 이동하여 수평으로 침대에
누울 때까지 기다리는 카메라의 차분함은 영화의 예의다. 이는 침상 위에서 세 인물이 미래를
논할 때 살짝 내려앉는 카메라 무빙으로 이어지고, 종내는 물러섬으로서 거리를 확보하는 데 이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 그리고 두 사람과 카메라와의 거리가 본편이 원작과 세계에 동행하는 방식이다.
나무는 수직-수평이 아닌 비스듬히 육신을 지탱하고, 모질게 낙엽이 흩날려 무인의 풍경을 감당한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29 불량아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