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반의 여행 (Sullivan\'s Travels,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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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반의 여행 (Sullivan's Travels,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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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34 금옥
감사합니다
GIVE 3 MP S 푸른강산하
감사합니다.^^*
20 pupu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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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자강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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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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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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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궁금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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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Roo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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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불량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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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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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이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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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앵두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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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i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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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쪼꼬우유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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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십이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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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난대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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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영화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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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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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백마
고맙습니다^^
15 지혀니아빠
감사합니다..
S dreammaker
고맙습니다.
2 파이즈
감사합니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3. 11. 16. 감상

단  평 : '되기'의 탄력성


영화가 환타지일 수 있는 서사적 사유는 변신에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일상의 지속성에 대한
불가능한 반기가 빛의 부재 하에서만 가능함을 지시한다. 가령, 본편에서 인물이 의도치않게
참된(?) 현실로 소속되는 순간은 어둠 하에서만 실행되지만, 정작 그를 그같은 상황으로
내모는 부랑자는 빛으로 인해 소멸된다. 사고사한 부랑자의 죄는 강도 행각이 아니라, 감히
영화를 현실로 침입할 수 있도록 서사적 구실을 생성한 것에 있다. 성찰은 불허되어야한다.

전작에 이어 본편이 지속한 바를 알려진 바와 같이 할리우드와 리얼리즘 사이의 분열증이나
대공황기에 대한 속죄의식, 카프라의 이상향적 인민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정리한다면,
이를 위한 방법론으로 전술한 '~되기'의 가벼운 위장성을 긍/부정 어느쪽이든 승인하게된다.
전작이 프레임이 스스로를 벗어나는 의식으로 단지 발걸기와 넘어짐을 반복함으로서도
충분히 획득했던 장르적 탈주감을 전격적으로 '경험'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추락을 행한다.

그 과정에서 무례하게도 인물은 자신의 성적 환타지를 영화 제작자처럼 만족시키면서
만사가 귀가 가능하다는 할리우드의 이데올로기를 3회 이상 통용시킨다. 영화가 날 것의
연장으로서 21세기의 <노매드랜드>를 실현할 수 없지만,  <분노의 포도>로 정극화하는
것도 본편은 거부하고 기꺼이 자신을 대상화하여 변론을 행하는 것으로 헤피엔딩을 막는다.
기차 위에서 시작된 현상된 영화가 비행기 안에서의 선언으로 종결됨은 '되기'의 속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