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의 적 (My Enemy's Enemy,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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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적의 적 (My Enemy's Enemy,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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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용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를 조명한 영국 케빈 맥도날드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자막에 생략 가감이 많아 어영부영 짜집기 합니다. 쩝...다큐인데... 



 1983년 2월 24일 프랑스 리용의 검찰관 쟌 베르티에는 바르비(Barbie)에 대해 8개항목의 공소사실을 제시하였다.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비인도적 범죄사실들이었다. 비인도적범죄라는 죄목의 '발명'은 우리 시대가 이룬 성취였다. '외과수술'처럼 전쟁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 공소는 29세의 바르비가 리용에서 SD책임자로 일하면서 저지른 온갖 범죄를 저지른지 40년이 지난 후에서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8개항목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1943년 독일 경찰관 두명에 대한 공격의 보복으로 22명의 인질 살해

 2.1943년 19명의 체포 및 고문

 3.리용으로부터 86명의 유태인 송출을 방조

 4.1943년과 1944년 사이에 리용 주변에서 42명을 총살

 5.1944년 프랑스 철도노동자의 수색과 체포를 벌여 그 가운데 몇명이 다치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6.1944년 대부분이 유태인인 650명을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뤽 수용소에 이송


 7.브론시에서 70명의 유태인, 셍 제니 라발에서 두 목사를 비롯한 유태인 총살

 8.이지우 마을에서 대부분이 어린이인 55명의 유태인을 송출



 그러나 바르비의 죄악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41개의 공소사실로 늘어났다. 그는 새디스트로서 자신과 살던 스위스 여자를 싫증이 나자 총살해 버리고 유태인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기를 뺏어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던져 버리는 인간이었다. 이러한 냉혈적 행동으로 그는 여러번의 훈장을 나치정부로부터 받는가하면, 그리고 점령하의 프랑스인들로부터 '리용의 도살자'(Butcher in Lyons)라고 낙인찍히게 된다. 클라우스 바르비라는 이름은 프랑스에서 나치 시대의 악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바르비를 그토록 원하였던 이유는 그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지주였던 Moulin의 학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1974년 이후 널리 알려져 프랑스 정부가 송환 요구를 해 왔던 상태였다. 특히 나치전문가 Klarsfeld 변호사가 바르비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으나 볼리비아 정부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바르비의 추방은 양국정부의 은밀한 거래를 추측하게 하였다. 실제 라파즈에서 리용으로 바르비를 태우고 온 비행기에는 무기와 3천톤의 밀, 그리고 5백만불이 실려 되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프랑스는 강렬하게 바르비를 원했던 것이다.



 바르비재판은 1987년 5월 11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렸다. 당시 73세의 바르비는 인정신문에서 볼리비아에서 쓰던 가명 '클라우스 알트만'이라고 밝혔으며 주소는 라파즈라고 대답하였다. 이 재판동안 리용 시민들은 40년전 자신들의 투옥과 고문과 처형을 담당했던 책임자를 대면하여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바르비와 그 변호인들은 그 전쟁기간 중에 벌어졌던 모든 일의 책임을 바르비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면서 "다음에는 에펠탑을 훔쳤다고 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또한 이 재판은 프랑스의 학생들에게 하나의 좋은 역사교육이 되었고 언론은 이 기간 동안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바르비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한 39명의 변호사들이 유태인단체, 레지스탕스그룹, 개인적 생존자등이 재판의 복잡성을 더하고 있었다. 결국 9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유죄평결을, 3명의 리용형사법원 판사들은 무기형을 선고하였다.



 바르비의 존재는 미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비가 아직 프랑스로 송환되기 직전 미국의 CIC 요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우연히 볼리비아 라파즈의 뉴스를 보도하던 NBC 방송을 보다가 화면에서 사업상의 문제로 구속되었다는 바르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선명히 그의 인상을 확인한 그 요원은 NBC에 접촉하여 자신이 CIC 정보원으로 고용된 바르비등을 통제하던 CIC 요원임을 밝혔다. 이 모든 보도가 NBC에 다시 나가자 미국사회는 나치전범을 정보요원으로 사용하였다는 폭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미국이 주장해 온 전체주의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이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출처 : [기타] 박원순 변호사



 경우는 다르지만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도 CIC 요원이었음이 미국 정보문건에서 밝혀진 바 있다. 개주인이 따로 있었던 셈이다

 

Comments

1 달별
고맙습니다. 귀한 자료.
휴가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1 초가삼간
감사합니다
40 백마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