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들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Liberty, Ransom 밖에 Tom이 있을 때 이는 공평하지 않다.
이는 마치 오프닝의 기차와 엔딩의 기차가 단지 방향성만으로만 모순됨이 아닌 것과 같다.
오프닝의 기차는 정제된 극의 재질 그대로 내부로 곡선으로 진행한다면, 엔딩의 그것은
마치 자료화면을 접합한 것과도 같은 다큐적 품성으로 한번 꺾여진 지점을 내포한다.
본편의 유명한 대사를 빌자면, 극이 사실이 될 때 비로소 영화가 된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극과 다큐의 경계 따위나 이분법을 재론하는 등과 관련된 낡은 시선은 접어두어도 좋다.
외피에서 의도적으로 던져진 해석의 쾌감보다는 60년대라는 존 포드의 마지막 시간들,
가령 <서부개척사>에서 존 포드의 22여분간의 압축이 본편에서 승계되었을 때 영화가
내리는 강렬한 비극의 선택이 차지하는 감정의 밀도에 충복 充腹함이 적정한 자리가 된다.
이 맥락에서 집이 없는 외지인과 집이 있지만 그 내부에서의 생활이 보여지지 않는 정착민
중에서 스스로 자신의 집을 불태우기 위해 촛불을 내던지는 후자의 행위는 성찰의 만가다.
그릇 설겆이를 끝까지 고집하는 이와 사육하던 말을 모두 풀어버리는 대비 역시 이와 같다.
이같은 엇갈림이 용인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역마차는 'OVERLAND'로 명명됨으로서
그 장소 자체가 이동의 기호임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거의 유일하게 내부가 허용된 인물인
여성이 누구를 선택하는가는 로맨스 차원을 넘어선다. 말 馬의 해방은 일종의 안간힘이다.
톰은 여인의 식당에 언제나 뒷문으로 들어섰고, 그가 뒷문으로 돌아갈 때의 음영은 여인의
배웅에도 불구하고 남루한 복선을 면치못한다. 그 반대편에 홀로라도 능히 하나의 단락을
롱테이크로 유지할 수 있으며 유사 죽음에서도 회복되는 언론인이라는 지점 역시 그가
단순히 존 포드의 문학적 고주망태에 제한되지 않음을 진술하면서 '말'의 힘을 지휘한다.
누구나 예상하듯 톰은 '리버티'를 저격하지 않았다. 그의 진술 외에 어떤 근거도 보충되지
않을 때, 혹은 덧붙여지지 않았어도 좋았을 그 플래쉬백이 기어이 프레임을 비집고 올 때
관객은 '보여지지 않음'의 중함을 각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존 포드의 흑백영화라는 마지막 선택의 중의성을 감당해야하는 위치에 다다른다. 아마도
그것이 프랭크 카프라-존 F. 케네디의 맥락이 밸리를 삭제하고 공동체를 보존한 심경이다.
단평 : 성찰은 언제나 만가다.
이름들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Liberty, Ransom 밖에 Tom이 있을 때 이는 공평하지 않다.
이는 마치 오프닝의 기차와 엔딩의 기차가 단지 방향성만으로만 모순됨이 아닌 것과 같다.
오프닝의 기차는 정제된 극의 재질 그대로 내부로 곡선으로 진행한다면, 엔딩의 그것은
마치 자료화면을 접합한 것과도 같은 다큐적 품성으로 한번 꺾여진 지점을 내포한다.
본편의 유명한 대사를 빌자면, 극이 사실이 될 때 비로소 영화가 된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극과 다큐의 경계 따위나 이분법을 재론하는 등과 관련된 낡은 시선은 접어두어도 좋다.
외피에서 의도적으로 던져진 해석의 쾌감보다는 60년대라는 존 포드의 마지막 시간들,
가령 <서부개척사>에서 존 포드의 22여분간의 압축이 본편에서 승계되었을 때 영화가
내리는 강렬한 비극의 선택이 차지하는 감정의 밀도에 충복 充腹함이 적정한 자리가 된다.
이 맥락에서 집이 없는 외지인과 집이 있지만 그 내부에서의 생활이 보여지지 않는 정착민
중에서 스스로 자신의 집을 불태우기 위해 촛불을 내던지는 후자의 행위는 성찰의 만가다.
그릇 설겆이를 끝까지 고집하는 이와 사육하던 말을 모두 풀어버리는 대비 역시 이와 같다.
이같은 엇갈림이 용인될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 역마차는 'OVERLAND'로 명명됨으로서
그 장소 자체가 이동의 기호임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거의 유일하게 내부가 허용된 인물인
여성이 누구를 선택하는가는 로맨스 차원을 넘어선다. 말 馬의 해방은 일종의 안간힘이다.
톰은 여인의 식당에 언제나 뒷문으로 들어섰고, 그가 뒷문으로 돌아갈 때의 음영은 여인의
배웅에도 불구하고 남루한 복선을 면치못한다. 그 반대편에 홀로라도 능히 하나의 단락을
롱테이크로 유지할 수 있으며 유사 죽음에서도 회복되는 언론인이라는 지점 역시 그가
단순히 존 포드의 문학적 고주망태에 제한되지 않음을 진술하면서 '말'의 힘을 지휘한다.
누구나 예상하듯 톰은 '리버티'를 저격하지 않았다. 그의 진술 외에 어떤 근거도 보충되지
않을 때, 혹은 덧붙여지지 않았어도 좋았을 그 플래쉬백이 기어이 프레임을 비집고 올 때
관객은 '보여지지 않음'의 중함을 각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던
존 포드의 흑백영화라는 마지막 선택의 중의성을 감당해야하는 위치에 다다른다. 아마도
그것이 프랭크 카프라-존 F. 케네디의 맥락이 밸리를 삭제하고 공동체를 보존한 심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