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볼 것인가는 무의미하고,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가능하다면 실제 구사되는 것은
본 것은 무엇인가일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에 대해 프로이드와 라캉이 각자의 개념으로
각축하면서 남근과 팔루스, 거세와 상상-상징-실재계가 도식하여 즉각적으로 대입된다.
가령, 주인공 제프리스의 다리는 거세된 남성성을 지시하지만, 동시에 그의 또다른 남근은
카메라로 연장된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무엇을 볼 수 있는 시선의 권력임을 굳이
본편에 대한 무수한 논문을 들출 것도 없이 거의 상식화되었음을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제프리스의 공간은 건너편 주택과 더불어 서로 상상-상징계를 교차하지만, 결말부에서
살인범이 제프리스의 공간으로 와서 그를 추락시킬 때 순식간에 실재계의 장소로 귀환한다.
기실 살인범을 비롯한 건너편 주택의 모든 인물들은 그 자체로 남근 시선의 유일한 욕망인
대상화로서의 서사로 지정된다. 가장 완벽한 통제란 대상에게 사연을 부여하고 그것이
해제되는 과정에서 개입-목도하고 그 대상이 윤리화되는 지점을 응시로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연이 반전화되었다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이 욕망되었다는 결과이다.
금발 여성 리사는 남근에 대비되는 각종 이분법의 반대편으로 지정되었다가 곧 남근의
서사에서 그와 동일시를 행함으로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실하고 대리인 자격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남근을 거세하고 탈취하여 주체화하지 못하고 실재계의 종료 이후에
다시 남근의 위엄 아래로 복귀한다. 즉, 그녀는 결코 그를 위협하지 못하고 안전해진다.
본편은 결국 영화라는 매체의 고전적인 보는 것의 욕망이 결국 서사를 추인하게 되고, 다시
그로부터 서사 그 자체가 욕망화되어 관객을 2차 동일시의 공모자로 지정함을 인증한다.
하지만, 그 서사는 과연 실체였는가에 대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Blow-Up>으로
반론 제기하고, 또다른 후예들은 <The Conversation>, <Blow Out>로 이를 더욱 심화한다.
본편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제프리스가 추락함으로서 <현기증>을 준비하는 지점이
아니라, 인물이 자신의 발가락을 도구로 긁는 행위일 것이다. 이것이 거의 유일하게
영화의 정체성 너머에서 현실의 본능이자 육체의 감각으로서 자신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살인범에 저항하기 위해 플래쉬 섬광을 수회 터뜨리는 빛의 남근화보다 더욱더 이 긁음의
행위가 진중한 것은 이것이 어떤 서사에도 편입되지 않고 홀로 거기 감각됨에 있을 것이다.
여태 까먹고 있다가 오늘 찾아냈습니다.
고맙습니다^^
단평 : 서사의 욕망 그리고 욕망의 서사
무엇을 볼 것인가는 무의미하고, 무엇을 볼 수 있는가가 가능하다면 실제 구사되는 것은
본 것은 무엇인가일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에 대해 프로이드와 라캉이 각자의 개념으로
각축하면서 남근과 팔루스, 거세와 상상-상징-실재계가 도식하여 즉각적으로 대입된다.
가령, 주인공 제프리스의 다리는 거세된 남성성을 지시하지만, 동시에 그의 또다른 남근은
카메라로 연장된다.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무엇을 볼 수 있는 시선의 권력임을 굳이
본편에 대한 무수한 논문을 들출 것도 없이 거의 상식화되었음을 재론의 여지조차 없다.
제프리스의 공간은 건너편 주택과 더불어 서로 상상-상징계를 교차하지만, 결말부에서
살인범이 제프리스의 공간으로 와서 그를 추락시킬 때 순식간에 실재계의 장소로 귀환한다.
기실 살인범을 비롯한 건너편 주택의 모든 인물들은 그 자체로 남근 시선의 유일한 욕망인
대상화로서의 서사로 지정된다. 가장 완벽한 통제란 대상에게 사연을 부여하고 그것이
해제되는 과정에서 개입-목도하고 그 대상이 윤리화되는 지점을 응시로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연이 반전화되었다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이 욕망되었다는 결과이다.
금발 여성 리사는 남근에 대비되는 각종 이분법의 반대편으로 지정되었다가 곧 남근의
서사에서 그와 동일시를 행함으로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상실하고 대리인 자격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남근을 거세하고 탈취하여 주체화하지 못하고 실재계의 종료 이후에
다시 남근의 위엄 아래로 복귀한다. 즉, 그녀는 결코 그를 위협하지 못하고 안전해진다.
본편은 결국 영화라는 매체의 고전적인 보는 것의 욕망이 결국 서사를 추인하게 되고, 다시
그로부터 서사 그 자체가 욕망화되어 관객을 2차 동일시의 공모자로 지정함을 인증한다.
하지만, 그 서사는 과연 실체였는가에 대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Blow-Up>으로
반론 제기하고, 또다른 후예들은 <The Conversation>, <Blow Out>로 이를 더욱 심화한다.
본편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제프리스가 추락함으로서 <현기증>을 준비하는 지점이
아니라, 인물이 자신의 발가락을 도구로 긁는 행위일 것이다. 이것이 거의 유일하게
영화의 정체성 너머에서 현실의 본능이자 육체의 감각으로서 자신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살인범에 저항하기 위해 플래쉬 섬광을 수회 터뜨리는 빛의 남근화보다 더욱더 이 긁음의
행위가 진중한 것은 이것이 어떤 서사에도 편입되지 않고 홀로 거기 감각됨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