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 1953 (앙리-조르주 클루조 감독)

자막자료실

공포의 보수 Le Salaire De La Peur 1953 (앙리-조르주 클루조 감독)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1510596

원본 자막에서 프레임 변환, 싱크 조절, 일부 대사 수정(원문과 의미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된 자막 입니다. 

제작자: 미상(한글 제작자 분 알려주십시요) 

원본 파일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951990


위 원본 자막과 싱크가 너무 달라서 애 먹었습니다. 일괄 싱크 조절이 안돼서 여러군데 손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간혹 빠진 대사도 있고(그다지 의미 있는 대사는 아닙니다) 더구나 아주 칼싱크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볼만 합니다(완성도90%).

YTS 릴은 아마도 무삭제 버전인것 같습니다(criterion 버전보다 런타임 길어요).

앞뒤 여백없이 2시간 32분 40초 꽉 채웁니다(2시간 32분 40초 런타임, 24프레임, 2017년에 발매된 Restoration 버전 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 버전이 가장 좋은것 같네요. 


소설 '모비딕'에서 '스타벅스'가 나오듯이 이 영화로 부터 닌텐도 게임의 캐릭터 '마리오&루이지'가 나옵니다.

그 만큼 이 영화가 걸작이라는 반증이죠.

저는 고전 영화 '매니아'인데 한 가지 아쉽다면 고전이 대부분 '흑백영화'인것 입니다. 

흑백이 컬러 보다 '비장감'은 깊은데 반해, 

'인물의 심리'는 컬러 버전만큼은 담아내지 못하는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이 '흑백영화'라는건데 그래서 그런지...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1977년에 '소서러'라는 리메이크작을 만듭니다(와우! 이것도 너무 좋아요).  

아무리 그래도, 역시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 이브 몽땅 주연의 이 원작을 따라올 수는 없네요.

여러면에서 탁월한 영화입니다. 즐감하세요.


2020년 08월 14일, 코로나 시대의 캘리포니아 에서 

P.S. 조금 더 고친 version2 입니다 (파일명 뒤 v2 그 뒤에 알파벳은 미미한 수정본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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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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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30 하얀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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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컷과송
2023. 7. 17. 감상


단 평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서두에서 맑스적인 산업예비군을 논할 수는 있겠지만, 대사로 흘린 혁명을 칭할 바는 없다.

더불어 일상적인 폐쇄공포증이 극심한 무력함을 열기처럼 작열시키는 노골적인 장소성이

초반 40분을 지배하는 동안 이에 대한 반탄력이 이질적인 여성 육체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의 궤적을 명시적으로 차용하는 서사의 골격은 노동 스릴러의 장르성을 제압할

정도로 과격하게 반역 웨스턴의 외부인을 주체화시킨다. 첫 등장할 때 의상은 신분적이다.


뒤집어보자면, 외부인의 등장이 열기를 가져왔다는 것을 어떻게 감당해야할까라는 질문은

외부라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가와 등치된다. 여기서 자격이자 금기로 기능함은

젊은 여성과의 접촉이다. 본편에서 해당 여성과 신체적으로 잠시라도 접촉하는 이들 중

2인이 운전/죽음에 임한다는 것은 이를 인증하는데, 실제로 엔딩에서 여성은 춤을 추다가

갑자기 쓰러지고, 예정된 추락은 성사된다. 관객은 이 고전비극 아들의 생존을 불허한다.


문제는 길의 여부다. 아버지가 입장하여 그 곳의 무력함이나 직업인과 대적할 때까지와

여정을 시작한 이후는 왜 변형되는가에서 중요한 지점은 의상의 얼룩 이상의 탈의다.

정확히는 하얀 양복은 이제 검은 석유로 그 실체를 소멸시킨다. 아들은 정면을 응시하며

아버지를 명확히 직간접 살해한다. 발이 부상당하는 오이디푸스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고 죽음에 이르지만, 아들도 최후의 남근성을 영속화시킬 수 없다. 반대편

경쟁자가 고아 출신임을 진술하는 사유도 동일한 맥락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라는

거대 남근의 탈취로 아버지 제거라는 임무 완수의 경쾌함으로 위장된 권력성은

아들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입문을 허하지 않고 탈락시킨다. 여기에 어떤 사유가

있는가라는 의문은 본편이 철저히 고전 비극의 폐쇄성 하에 놓여있음으로 반문된다.

성장에의 '공포'는 아버지 살해라는 과정하에서 어떠한 '보수' 없이 주체를 폐기한다.
1 송채빈
자료 감사합니다.
19 주디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