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지의 물 (Swamp Water, 1941) 장 르누아르

자막자료실

늪지의 물 (Swamp Water, 1941) 장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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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 르누아르

각본: 더들리 니콜스

출연: 월터 브레넌, 월터 휴스턴, 앤 백스터, 데이나 앤드류스, 버지니아 길모어
촬영: 피버렐 말리, 루시엔 발라드
제작: 어빙 피첼
제작 보좌: 렌 해먼드

국적 및 언어: 미국 (영어)

상영 시간: 90분

#025


조지아 주의 광대한 늪지대 오커포노키는 종종 모험가나 수렵인을 유인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다시 돌려보내지 않는 곳이었다

벤 레이건은 아버지의 경고와 약혼자 메이벨의 간청을 뿌리치고 무서운 늪지대에 들어갔다가 살인 혐의를 받고 오랫동안 실종됐던 톰 키퍼를 만난다.

장 르누아르의 1941년작입니다. 할리우드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남부 고딕 느와르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다만 비슷한 남부 고딕 느와르로 꼽히는 '문라이즈'가 그랬듯이 일반적인 느와르랑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이쪽은 성장물에 가깝습니다.

르누아르 대표작으로 꼽히지 않고, 본인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작업은 아니었다고 합니다만 꽤 흥행도 했고 특유의 테크닉도 살아있어서 괜찮게 볼 만합니다.

영문 위키에서는, 제프 니콜스의 '머드'랑 비슷한 지점이 많다고 그러더군요. 훗날 장 네글레스코가 월터 브레넌을 다시 기용해 컬러로 리메이크 했습니다. ('Lure of the Wilderness')


번역이 은근히 까다로웠습니다. 블루레이에는 영자막이 없어서 DVD 영자막을 끌어다 썼는데 이 자막도 빼먹은 대사가 있어서 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남부 사투리가 심한 편이라 현지인들도 자막 없이는 힘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처음 듣는 관용어나 단어를 쓰더군요. (young 'un이라던가)

복잡한 대사가 없어서 어찌 처리하긴 했습니다만 남부 말투가 몽땅 날아간 밋밋한 번역이 되버렸습니다. 미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30 하얀벽돌
자막 제작 고생하셨습니다.
18 슈샤드
수고하셨습니다.
10 천리무봉
감사합니다
21 holyshit
감사해요
31 꺽지
감사합니다
23 다솜땅
감사합니다. ㅎ
GIVE 5 MP 33 스피리투스
고맙습니다.
13 zzazzerdamn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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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Lowchain232
댓글내용 확인
38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서 영화를 찍게 되는 이유는 <게임의 규칙>(39)이 비평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상업적으로 엄청난 실패를 하게됩니다. 영화는 처음 제작비를 두 배 초과한 상태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제작사측에서 처음 상영시간인 113분이 너무 길다고 헤서 13분을 잘라냅니다.  첫 상영회 날에 관객들은 항의의 표시로 울부짖고 휘파람을 불고 좌석을 찢고 신문에다 불을 질렀습니다. 르느와르는 영화가 경박하고 서툴고 이해할 수 없으며 게다가 비애국적이라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영화사를 살려야 한다는 희망으로 르누아르는 추가 삭제에 동의했고 85분짜리와 90분짜리 두 버전의 영화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9년 10월에 <게임의 규칙>은 사기저하라는 이유로 금되되었고 이듬해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진군했을 때도 재차 금지됩니다. 전쟁 후에 이 영화는 80분에서 90분 사이의 다양한 버전으로 상영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바보들이나 보는 영화'로 치부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복원되는데에는 1956년에 200캔의 아웃테이크가 우연히 발견되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르누아르의 협조로 원래 113분짜리를 1분을 제외하고 모두 복원했고 1959년 베니스에 상영되면서 잃어버렸던 걸작으로 칭송되었지요. 이후 이 영화의 명성은 관객과 비평가들 사이에서 르누아르 영화의 최고 걸작이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재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게임의 규칙>을 만들던 당시 장 르누아르는 우울증게 걸려서 영화를 포기하거나 프랑스를 떠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려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일이 어느정도 수습되면서 르누아르는 후자를 택했습니다(프랑스에서 다시 영화를 만들기까지 15년의 세월이 걸려야 했습니다). 1939년 7월 르누아르는 <게임의 규칙>을 시사회 이후 로마로 떠납니다. 그는 거기서 푸치니의 <토스카>를 영화화하기 위해 스칼라좌에 초청을 받습니다. 초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아서 영화를 찍을 수 있었지만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전쟁 포고를 하면서 르누아르는 영화를 포기하고 그이 조수인 칼 코흐와 비스콘티에게 영화를 맡기고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독일군이 파리로 진격하자 르누아르는 남쪽으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끈질긴 유혹을 받게 됩니다. 르누아르는 '너무 매혹적이고 눈부신 제안이었기에 떠나는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르누아르의 미국 시기가 시작됩니다. 전쟁 전부터 알고 지내던 로버트 플래허티와 알버트 르윈의 도움을 받아 미국 입국 비자를 받은 그는 1940년 12월 알제리, 카사블랑카,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탑니다. 같은 선실에 작가 생텍쥐베리가 타고 있었다고 하네요. 르누아르는 1941년 1월에 할리우드에 도착해서 폭스사의 대릴 재눅과 1년 계약을 맺습니다. 르누아르는 선실에서 만난 생텍쥐베리의 원작 <인간의 대지>를 비롯해서 다양한 주제를 제안했지만 '지나치게 유럽적'이라하여 영화사로부터 거절당합니다. 결국 베린 벨 원작을 더들리 니콜스(존 포드의 <밀고자>를 쓴 인물)가 각색한 <늪지의 물>로 결정이 났지요.
살인의 누명을 쓰고 늪지로 피신하는 주제에서 아마 르누아르는 인간과 사회, 자연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나중에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위대한 주제를 꿰뚫지 못하고 지나쳤지만 바보같지 않은 이야기로 영화를 연출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나를 괴롭힌 것은 간섭이 아니었다. 나는 간섭을 좋아한다. 그것은 토론을 낳기 때문이며, 토론이 잦아지면 작업 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르누아르는 말합니다. 그를 괴롭힌 것은 할리우드의 완벽주의였습니다. 대릴 자눅은 르누아르가 오키페노키 늪에서 촬영을 하려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자연과 같거나 그보다 더 나은 완벽한 늪을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죠. 초기에 이런 문제로 실랑이가 있었고 나중에는 대릴 자눅이 편집에까지 관여하려하자 르누아르는 경악을 했습니다.
그는 비참한 상태에서 영화를 완성했고 각색을 맡은 더들리 니콜스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폭스사에서 영화를 찍느니 차라리 멕시코에 가서 땅콩을 팔겠다'. 이 영화는 '무심하게 만들어진 촌스런 영화'라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뉴욕 비평가 상을 받습니다.
아무튼 보기 힘든 영화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2008년에 시네마테크 기획전에서 이 영화 이후에 만들어지는 <이 땅은 나의 땅>(43), <남부인>(45) 그리고 <어떤 하녀의 일기>(46), <해변의 여인>(47)과 같은 미국 시기의 영화만 봤는데 이 영화는 처음 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_ _)
12 Lowchain232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사실 장 르누아르 본인이 아쉬워할만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실력은 죽지 않아서 꽤 볼만한 남부 고딕물였던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프랑스 시절 르누아르 영화도 듬성듬성 봐서 좀 더 열심히 봐야겠네요 ㅋㅋ
S 컷과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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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언제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19 큐담
수고하셨습니다.
S 인향
감사합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GIVE 5 MP 10 cinephile001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14 푸른눈
수고하셨습니다
8 redjean
감사합니다
S dreammaker
고밉습니디.
4 darthez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2. 4. 17. 감상

단  평 : 개는 문제를 맡는다


본편의 불구성을 논하기 전에, 감독의 1932년작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를 상기하는 편이
후인들의 무수한 모방작을 거론하는 것보다 흥미로울 수 있음을 지적해야한다. 물론, 이에는
물의 오래된 모순적인 속성이 있고, 오히려 물이 아니라 모순이 가지는 모호함 그 자체의
위험의 기의가 고전적인 강력함을 신비적으로 유지함도 있다. 문제는 그것이 항시 거기에
있는가에 대한 실증적 논박일텐데, 본편은 이 지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철학적으로 잔존한다.

이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본편은 '트러블'이라는 애칭의 늙은 견공을 전면에 위치시킨다.
엔딩이 그 누구도 아닌 개의 클로즈업이라는 점은 과도한 친절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개가
늪지 밖으로 나온 사회인의 손에 잡혀있는 결말은 그다지 환영할 바는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본편이 환영받을 수 없는 길들여짐이다. 늪은 무르나우의 <터부>보다는 확연히 헐리우드적
대중성을 전시한 채로 이분법의 징벌과 보호의 장소로 격하된다. 누군가에게는 늪의 영향력이
밖으로 스며들거나 확장되지 않아 사회가 본질화되지 않음을 한탄하겠지만, 이는 정당하다.

사건의 진상에 대한 사법 절차, 누설한 여인의 단죄, 군중의 왜곡 등이 웨스턴적 무도회로
봉합하려는 성급함은 오히려 그만큼 늪 밖의 허위적 남근성을 증언함으로 적확하다.
첫 장면의 해골 십자가가 늪지의 물 위에 세워져있음도 동일한 맥락인데, 늪 밖 어디에도
혹은 누구도 종교의 표지를 확인하지 못함도 판결적인데, 이는 두 아버지가 동일한 성장을
추인했음을 인정함만큼 남루하다. 늪이 소도로서 종교적 대항력을 내재하지 못함은 아쉽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S rayphie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