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 1953) 720p.HDTV.DD2.0.x264 - SAPHiRE R.LOVE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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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 1953) 720p.HDTV.DD2.0.x264 - SAPHiRE R.LOVE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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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헵번


(1929-1993)


벨기에 브뤼셀출생.






어린시절
어린시절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제임스 A. 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때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남작의 작위를 계승한 아내의 콧대에 질린 오드리의 아버지는 2차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얼마 안있어 오드리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영국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드리헵번은 영불 해협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유년기를 보냈어야 했다.



그녀는 그럼에도 그다지 불행한 나날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영국에서 기숙학교를 마치고 10세에 어머니 곁으로 돌아간 그녀는 2차 대전이 발발한 기간 동안 어머니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후로는 학위가 인정되는 학교에는 다닌 바가 없으니 그녀의 최종 학력은 '국졸'정도가 되는 셈이다. 오드리는 이 시기에 발레리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네덜란드의 아르넴에서 어머니와 휴가를 보내던 중, 히틀러의 군대가 마을을 점령했다. 오드리는 우울증과 영양 실조에 시달렸다 나치점령 하에서 오드리는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녀는 런던에서 발레를 공부하게 되었으나 전쟁으로 외가인 남작가가 재산을 거의 다 날리게 되어 학비를 스스로 부담해야만 했다.




그녀는 사진 모델과 코러스 걸, 댄서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고, 틈틈히 펠릭스 에일머 교수의 드라마 강의도 들었다. 이 수업 덕분에 오드리는 [야생 귀리], [젊은 아내 이야기], [라벤더 힐 몹]과 같은 영국 영화에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장학생으로 런던의 발레 학교를 다녔고, 후에 모델 일을 시작했던 오드리는 뛰어난 모델이었다. 영화 제작자가 오기 전까지 모델은 그녀의 천직처럼 보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살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가서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잠피감독의 눈에 띄어 Laughter in Paradise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나치의 점령하에 어려웠던 시절로 인하여 그녀가 평생하고 싶었던 역할이 ' 안네 프랑크'역할 이었다고 하며, 이렇게 힘들었던 기억은 그녀로 하여금 세계의 정상에 올라간뒤 어린이들의 가난 구호에 앞장서게 한 것이다.

배우
유럽의 이곳저곳에서 '구대륙의 교양'을 쌓은 그녀가 할리우드로 건너온 것은 1951년. 할리우드는 파리의 어느 까페한 구석에 앉아서 새침을 떨고 있는 듯한 말라깽이 아가씨에게서 유럽의 우아함을 기대했고, 그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선배 격인 비비안 리, 레슬리 캐런, 피어 안젤리 못지 않은 선풍을 불러 일으키며 할리우드입성에 성공한 그녀는 할리우드가 배우를 키워내는 동시에 속박하는 스타시스템에 마지막으로 승차하였다.




1950년대는 할리우드의 배우사에 있어서 참으로 묘한 시절이라고 볼 수 있는 시기이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배우들- 클라크 게이블, 캐서린 헵번, 수전 헤이워드 등은 '지는 태양'이긴 했지만 마지막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그 반대편인 미국 동부와 유럽에서는 새로운 별들이 뜨고 있었다.




즉, 50년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찬란한 배우의 시대이다. 배우 지망생들은 어느 길이나 선택 할 수 있었다. 연기력에는 자신이 없지만 용모가 빼어난 이들은 스튜디오의 스칼렛 (스타 후보생)으로 발탁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연기로 승부하고 싶은 이들은 뉴욕으로 가서 연극 무대로부터 출발하면 되었다.




그레이스 켈리나 마릴린 먼로, 에바 가드너와 같은 스튜디오 시스템의 마지막 불꽃이 있었던 반면에 제임스 딘이나 말론 브란도, 혹은 줄리 앤드류스 같은 연극 무대출신의 배우가 공존했던 시대라는 이야기다. 이중에서도 오드리 헵번의 위치는 참으로 재미있다. 1950년 마리오 잠피 감독의 눈에 띄어 Laughter in Paradise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던중 1951년에 오드리는 파리로 건너가서 [몬테카를로 베이비↑]라는 영화에 출연한다. 휴양지인 리비에라에서 진행된 촬영 기간 동안에 오드리는 행운을 거머쥐게 되는데, 이것은 묵고 있던 호텔에서 여성작가 꼴레뜨를 만나게 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초 의 파리를 무대로 벨에포크 시대의 사람들을 그려냈던 이 작가는 오드리의 요정같은 아름다움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작품 [지지]를 뉴욕에서 공연할 때 주연을 맡겼다.








아니타 루스의 연출로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지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연극 공연을 보았던 빌리 와일더 감독 역시 오드리 헵번을 대어로 점 찍었다. 훗날 뮤지컬 영화로도 제작된 [지지]의 영화 프로젝트에서도 오드리 헵번에게 주연을 맡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유럽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공주의 이야기를 찍으려 고심하고 있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게 오드리 헵번은 놓칠 수 없는 보석이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유럽 상류층이라면 배워야 할 교양, 발레나, 어학, 에티켓 등을 자연스럽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그녀는 로마의 휴일에서 천진하면서도 우아한 공주역을 그레고리 펙을 상대로 보여주었고, 그 결과는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해에 가장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다. 그녀의 인기 요인 중의 하나는 당시 섹스 심벌들과는 달리 요정같은 외모와 고상한 기품이 있었다는 점이다.





로마의 휴일(1953)


오드리 헵번에게 오스카를 안겨 주며 오드리 신드롬을 낳게 한 명작. 이언 헌터 원작을 바탕으로 유럽 각국을 친선방문 중인 어느 작은 국가의 공주 앤(오드리 헵번)이 꽉짜인 일정에 싫증을 느껴, 남몰래 로마 대사관을 빠져나오는데, 그녀를 발견한 미국 신문기자 조와의 사이에 여러 소동이 벌어지는 이야기. 오드리 헵번은 이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국내에도 1955년에 개봉되었다. 케더린 옥센버그 주연으로 TV판으로 리메이크를 했는데 이때는 1980년를 배경으로 하였다.





사브리나(1954)


사뮤엘 테일러의 희곡 <사브리나 페어(Sabrina Fair)>를 테일러 자신과 감독인 빌리 와일더, 각본가 어네스트 레만의 3인이 공동 각색한 작품으로, 영화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부잣집의 운전수의 딸로 처음에는 촌닭 같았다가 주인집의 배려로 파리에서 교육을 받고서 멋진 아가씨로 탈바꿈하는 오드리 헵번, 그녀를 은근히 사랑하면서도 마음을 나타내지 못하는 큰 아들 험프리 보가트, 노골적으로 그녀를 노리는 플레이보이 둘째 아들 윌리암 홀든, 이 3명의 캐스트가 기막히게 어울리는 조화를 보여준다.

오드리가 거둔 성공은 영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숏커트나 [사브리나]에서 입고 나온 '사브리나 팬츠' 그리고 디자이너 지방시의 작품인 우아한 드레스등은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로마의 휴일]에 이은 다음 작품은 전작을 함께 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브리나]였는데, 이 영화에서부터 한동안 헵번이 연기하는 캐릭터에서는 묘한 일치가 나타났다.




그것은 아버지뻘에 가까운 연상의 남성 캐릭터와 연애하는 역할이었는데, [사브리나]의 험프리 보가트, [하오의 연정]의 게리 쿠퍼, [화니 페이스]의 프레드 아스테어, [샤레이드]의 케리 그란트, [전쟁과 평화]의 멜 퍼러 등이 그녀의 상대 배우였다.








특히 멜 퍼러는 연극 [온디느↑]의 공연을 함께 마치고 난 뒤에 오드리 헵번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두 사람의 나이차는 열두살이었으며, 멜 퍼러에게는 세 번째, 그리고 오드리 헵번에게는 첫 번째 결혼이었다. '타임'지는 [사브리나]에서 헵번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헵번의 매력은 매순간마다 분명해지는데, 이는 그녀의 매력이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력 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연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관객의 상상력은 더욱 커진다. 헵번은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사브리나]에서 매우 작은 연기를 보여준다."





전쟁과평화(1956)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대하 소설 '전쟁과 평화'를 파라마운트가 하나의 업적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영화화한 초대작.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인간과 전쟁, 그리고 사랑의 대하 드라마로 개봉 당시 엄청난 구모의 제작비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어엿한 스타가 된 오드리 헵번의 다음 작품은 남편인 멜 퍼러와 함께 공연한 톨스토이 원작의 [전쟁과 평화]였다. 킹 비더 감독의 이 3시간짜리 대하 드라마에서 오드리 헵번은 순진한 여주인공 나타샤 역을 맡았는데, 두 부부의 연기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인 57년의 출연작은 28년 연상인 대 배우 게리 쿠퍼와 열연한 [하오의 연정↑]. 그녀를 발탁한 빌리 와일더 감독의 달콤씁쓸한 로맨스 영화로, 헵번은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학교 학생 역할을 맡아 바람둥이인 게리 쿠퍼를 유혹한다.







같은 해에 출연한 스탠리 도넨 감독의 [화니 페이스↑]에서도 30년 연상인 프레드 아스테어와 공연하였다. 이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이 맡은 역할은 지방시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햇병아리 패션 모델의 역할이었는데, 뮤지컬 배우인 아스테어와 주제가인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을 멋들어지게 부르기도 하였다. 연극 [온디느]의 제작자였던 오드리 헵번의 남편 멜 퍼러는 아내의 청순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디느]와 비슷한 소재의 영화인 [녹색의 정원↓]을 제작, 감독했다.








제작사 측에서는 원래 제임스 딘의 연인이었던 피어 안젤리에게 이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결국 역할은 오드리 헵번에게 돌아갔다. W.H. 허슨의 원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오드리 헵번은 야생에서 성장한 어린 아이같은 소녀역을 연기하였으나 그녀의 도회적인 이미지는 별로 이에 어울리지 않았고, 영화는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첫 번째 실패작으로 남았다. 같은 해인 1959년에 출연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영화 [수녀 이야기↓][녹색의 정원]에서 맛본 실패를 보상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헵번은 여기에서 콩고로 파견된 벨기에 출신의 수녀 역을 연기하는데, 이 역으로 다시 한 번 오스카에 노미네이트 된다.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다른 출연작에서 보여준 순진한 매력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유혹에 빠진 젊은 수녀 역할은 오스카 심사위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드리는 61년작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홀리 골라이틀리를 열연하여 영화 인생의 정점에 올라 섰다.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캐포티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뉴욕 5번가에 있는 보석상 티파니를 세계적인 패션 스토어로 만든 이 작품은 화사한 도시 감각이 오드리의 개성과 잘 어울리며 뉴욕의 상류 사회에 들어가려는 밑바닥 인생의 삶과 애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영화를 더욱 유명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유명한 선율의 주제곡 "Moon River"로, 자느 메르세가 작사하고 헨리 멘시니가 작곡했다. 아카데미-작곡, 편곡, 주제가상과 그래미-올해의 노래, 레코드, 편곡상의 3관왕을 차지하였고 60년대를 대표하는 명곡이 되었다. 원제 '티파니스(Tiffany's)'는 뉴욕에 있는 유명한 보석상의 이름(Tiffany & Co.)이다.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영화 시작 부분에서 티파니의 진열장을 들여다보면서 가지고 온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하는 데에서 나온 제목이다. 이 영화도 마지막 장면이 유명한데 폴의 도움으로 석방된 홀리는 참다운 폴의 사랑을 발견하며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폴의 품에 안기는 명장면이다.

61년에 만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그녀에게 네번째 오스카 노미네이션을 가져다 주었다.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이 영화 에서 헨리 맨시니가 작곡한 감미로운 주제가 'Moon River'를 기타로 치면서 노래하는 주인공 홀리 고스틀리 역은 많은 팬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역으로 네번째 후보 지명을 받았다.






마이 페어 레이디(1964)


브로드웨이에서 7년동안 롱런한 뮤지컬을 영화화한 것으로 버나드 쇼의 '피크말리온(Pygmalion)'을 토대로 영원한 꿈인 변신의 욕망을 환상적인 이야기로 그린 명작. 런던을 배경으로 남루한 복장에 품위없는 말투로 꽃을 팔고 있는 일라이자라는 여성을 우연히 발견한 언어학자인 히긴스 교수가 절친한 친구인 피거링 대령과 이 하층계급 여성을 세련된 귀부인으로 만들기 내기를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




그녀의 전성기에 제작된 마지막 화제작은 워너브라더스사에서 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제공해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였다. 여주인공 일라이자 둘리틀 역은 원래 뮤지컬의 원작이었던 브로드웨이 연극 버전의 주인공인 줄리 앤드류스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워너브라더스 사는 오드리 헵번의 지명도를 보고 그녀에게 역할을 맡겼다.




더글러스 맥베이를 상대로 연기를 펼친 오드리 헵번의 목소리는 그녀의 노래 실력을 불안하게 여긴 영화사 측에 의해 가수 마니 닉슨의 목소리로 더빙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오드리 헵번의 발랄한 연기는 더빙했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반감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에 비해 오드리 헵번에게 역할을 빼앗긴 줄리 앤드류스는 같은 해에 제작된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오드리 헵번이 할리우드에 건너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연극 [지지]의 영화판에 출연할 것을 거절했던 일을 되살려보면 퍽 아이러니한 일이다. 언젠가 상대역이었던 렉스 해리슨에게 가장 좋아하는 상대 여배우가 누군지 묻자 그는 망설임없이 오드리 헵번을 꼽았다.








[어두워질 때까지(67)↑]는 그녀의 마지막 여우주연상 후보 선정작이 되었고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잠정적 은퇴에 들어갔다. 스위스에 살면서 두 번째 아들을 낳은 그녀가 다시 영화에 출연한 것은 76년의 [로빈과 마리안↓].








숀 코네리가 나이든 로빈 후드를 연기하고, 그의 연인 마리안 역을 오드리 헵번이 맡았는데, 이 영화는 두 쟁쟁한 배우가 얼마나 곱게 늙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외에는 별다른 목적이 없었던 듯하다.





이외에도 테렌스 영 감독의 멜로 드라마 [혈통↑]에 출연하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곁에↑]에서 천사 역으로 '우정 출연' 해준 것외에 그녀의 연기 생활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결혼


1954년오드리 헵번은 [전쟁과 평화]에서 함께 공연한 멜 퍼러와 결혼했다. 1960년에 스위스로 이주하여 이해에 오드리 헵번은 맏아들 쇼을 낳았고,두 사람은 대서양을 오가며 연기생활과 결혼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후 1968년에 오드리 헵번은 13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 멜 퍼러와 이혼하였는데 이전의 두 번의 결혼 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을 피웠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같은 해에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심경과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영화 [길 위의 두 사람↑]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영국 배우 앨버트 피니와 30대 부부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때문에 괴로워 하는 30대 여성의 연기를 실감나게 펼쳤고, 응당 그 해의 오스카를 수상했음직하다는평가를 받았다. 이 와중에도 이 영화의 제작을 맡았던 이는 전 남편인 멜 퍼러로 알려져 있다. 오드리 헵번의 이후 출연작들은 더 이상 순진한 천사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혼한 뒤 2년만에 오드리 헵번은 이탈리아인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 한다. 그는 그녀의 오랜 팬으로, 유럽에서 그녀의 이혼 소식을 듣고, 할리우드로 달려와 헵번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도록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스위스에 살면서 두 번째 아들 루카를 낳은 오드리 햅번은 1979년 도티와 이혼한 뒤로는 독신으로 살아왔다.

값진 인생
이혼 후 두 아이와 함께 살면서 오드리 헵번은 유니세프의 평화대사역을 수행하기도 하고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는 자선 행사를 주최하기도 하였으며, 기아에 허덕이는 세계 오지의 어린이들 구호에 앞장서 88년부터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이디오피아, 수단, 베트남을 방문하는 등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젊은 날의 청초함은 눈가의 주름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누구보다 아름다운 고결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드리 헵번은 곱게곱게 늙어갔다. 데뷔 시절의 몸매인 170센티미터에 50키로그램이라는 늘씬한 몸매도 유지하면서. 1992년,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을 위한 그녀의 자선 활동은 전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오드리 헵번은 대장암에 걸린 사실을 발견하고 11월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완쾌하지 못한 채 스위스 자택으로 거처를 옮겨치료를 받아오다 결국 1993년 1월 20일 스위스 제네바호의 톨로체나즈 마을 자택에서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




톨로체나즈 마을은 헵번이 지난 66년부터 영화계를 은퇴해 두 아들을 키우면서 지냈던 곳으로 그녀는 레만호와 눈덮인 알프스 몽블랑이 굽어보이는 묘지에 안장됐다. 오드리는 1993년 3월 29일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인도주의상'을 수상할 예정 이었으나 이 영광을 안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그녀의 사망소식은 영원한 소녀같던 그녀를 아끼던 많은 팬들에게 슬픔을 금치못하게 했다. 더구나 1989년부터 세계아동기구의 친선사절로 헐벗고 가난한 어린이들 구호에 앞장서 수단, 에디오피아, 베트남,소말리아를 방문하였고 만년을 어린이 구호에 앞장선 그녀의 인도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게 했다.




그녀의 우아함과 천진함을 기억하고 있었던 많은 팬들이 슬퍼하였다. 그녀의 생애는 자신의 첫 성공작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공주 못지 않게 고귀한 추억으로 마무리되었다.



청순미로 따지자면 내 나이의 세대에겐 올리비아 핫세를 떠올릴 것이다. 홍콩의 진추하도 청순미인의 한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청순미인은 오드리 헵번이다. 오드리 헵번는 청순미에 귀여운용모를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연기에도 탁월했으며 패션에서도 시대를 앞서 간 배우였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빈민어린이를 위해 구호에 앞장섰던 모습은 지금도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오드리 헵번~! 그녀는 아름다운 생을 살다간 이시대 가장 위대한 여배우임에 틀림없다.
 

Comments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20 큰바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