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 브라보 (Rio Bravo, 1959) 1080p.BluRay.AC3.DL.x264-HDC

자막자료실

리오 브라보 (Rio Bravo, 1959) 1080p.BluRay.AC3.DL.x264-H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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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박재윤
대박!!!!!!!!!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흑흑... 감동적이네요.ㅎㅎ
잘 보겠습니다~
1 낭만서생
수고하셧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
26 로카롤라
좋은 자막 고맙습니다~^^
29 routeone
명작 중에 명작인데 이렇게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ㅠ ㅠ
1 박재윤
덕분에 잘봤습니다.ㅠㅠㅠ
너무 재밌더군요
드디어 1년만에... 드디어 봤네요
자막요청 받아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__)(--) 꾸벅
1 아지랑이
시간이 나면 이 영화 자막을 새로 만들려고 했는데 sub이 나왔군요.
영화도 명작이지만 삽입곡인 My rifle, pony and me 또한 불후의 명곡이죠.
사실 요즘은 몸이 힘들어서 영화 한 편 보기도 힘듭니다.
한 달 동안 한 편도 못 본 것 같아요. 아무튼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49 iratemotor
몸조리 잘하세요... 아직은 밤낮 기온차가 있더군요.
좋아하시는 영화이니만큼 여유되실 때 칼 같은 교정 부탁드립니다.
편한 밤 되세요. 아.. 술 많이 드시지 말고요. ㅎㅎ
9 공처가
고맙습니다.
40 Daaak
감사합니다.
S 컷과송
단평 : 사투가 끝나야만 그녀가 쇼걸인 것을 밝힐 수 있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와 본편 사이에 있는 "파라오의 땅"은 이후에 따로 감상하겠지만,
혹스가 고전 서사극 속에서 명백히 죽음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붉은 강"이후 지금은 만날 수 없는 "빅 스카이"를 제외한다면
 본편은 하워드 혹스가 12년만에 다시 연출한 서부극이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하나의 정통이며 혼합체이고 그 자신의 '지금'이다.
프레드 진네만의 "하이 눈"에 대한 우파 이데올로기적인 대답으로 읽는 시각이나
 스크루볼 코메디를 비롯한 혹스적 장르의 완벽하고도 기괴한 통일체로 해석하는 쾌감은 거부할 수 없다.
더불어, 낭만적이지만 고립된 영웅주의와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집단의 대비 역시도 빼놓을 수 없다.

내게 "리오 브라보"는 혹스가 30년대 "천사만이 날개를 가질 수 있다"로 돌아왔지만,
20년동안의 시대 변화를 극 내부에 은밀하게 노정시키면서 한 편으로는 여전히 예전의 정서를 기치로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붕괴된 남성 집단의 동질감과 연대에 대한 조사가 동시에 담겨져있는 것으로 보였다.
 "붉은 강"에서 이미 건국적으로 증명된 바 있듯이,
웨스턴 장르 자체는 개인이든 아니든간에 남성 동성 사회라는 신화에 기초하고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그것은 장르의 규칙마냥 웨스턴에서 여성이 정숙한 부인 아니면 창부 양갈래인 이유이기도 하다.

기존의 고립된 타운 드라마의 정사 이분법이라는 클리세들을 총합한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은근히 서부극의 불안한 성적 견고함의 이면을 직시하는 본편은
 첫 오프닝 이후 전혀 마을 외부로 나가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서 그 자체를 하나의 외딴 공포극으로 만든다.
여기서 공포란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가 여전히 견고한가에 대한 전전긍긍이라고 해야겠다.
물론, 내부란 웨스턴 그 자체이자 혹스적 세계인 남성 동성 사회의 회복과 유지에 다름 아니다.

 "하이 눈"의 반대편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말하기 위해
50년대 당시 매카시즘 이후 미국인들이 가졌던 '좌파들의 부유함'이라는 역사적 지식이 없다면
 마치 "하이 눈"이 좌우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한 모호한 텍스트가 되는 것처럼
 본편 "리오 브라보" 역시도 동일한 상황과 구조 안에서 좌우 어느 쪽으로도 가능하다.

우파의 대답으로 읽혀질 근거라면 그것은 존 웨인이라는 할리우드 내 우익 거인 이미지와 더불어
 영화 속 다소 빈약한 인종주의(호텔 주인 멕시칸, 장의사 동양인)과 50 달러 금화 정도로 축약되겠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적만을 상정한다면 오히려 "하이 눈"보다 본편의 악당 형제는 농장 부르조아에 가깝다.

또다른 측면의 독해 중 하나인 고립된 개인영웅과 도움받는 보안관이라는 비교점에서
 존 웨인이 몇번이나 내뱉는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없어'는 오히려 극 내부의 흐름과 모순적이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누구냐하는 것이고,
더불어 "도움"이 단순히 외부자의 공격에 대한 방어적인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역시 더해진다.

영화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남자의 모습은 영화 내부를 거의 지배하는데,
딘 마틴이 아마도 그가 맡은 배역 중 거의 유일한 밑바닥 알콜 중독자의 모습이라 할 전직 보안관 보조역은
 그의 알콜 중독에서의 재기야말로 극 내부의 하위 텍스트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여기서 '알콜'을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으로 읽어야할 이유라면 타구로 던져진 동전 한 잎의 모욕이겠지만,
그것은 본편을 바라보는 다른 맥락, 즉 남성 동 성 사회 간의 파벌론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여타의 서부극처럼 왜 주인공 존 웨인에게만 여성은 허용되고
 그 누구도 가족이나 여성의 끝자락이라도 보여지지 않는가에 대한 오래된 장르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주목할만한 숏으로 악당 형제 중 처음 등장하는 동생이 총을 꺼내어 사격하는 장면을 카메라는
 머리와 다리가 보이지 않는 잘려나간 몸의 중반 부분(벨트 안에는 남근이 숨겨져있을)으로 컷팅하여 올린다.
총을 꺼내고 발사하는 장면이 극 내 다른 어떤 총격 장면보다 중요시되어야할 이유는
 다름 아닌 이 총의 사격 대상인 피해자가 권총이 없는 무방비 상태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도식적으로 설명할 때 살인이라는 범죄에 대한 보안관의 단죄를 유발한다는 측면이 우선되겠지만,
피해자에게 왜 권총을 허용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거세된 남성, 즉 집단에 포함될 자격을 논할 여지가 보인다.
정리하자면 본편은 두 개의 남성 동집단 간의 휴머니즘적 대결 구도를 띠고 있다.

거대 목장주라는 기존 세력의 남성 동성 집단(악당들이 형제라는 구성도 의미심장하다,)에 대항하는
 고용인(존 웨인 집단은 그들이 고용인임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그것이 명예롭다는 점을 윤리적으로 항변한다.)
으로 정리되는 보안관 세력 간의 갈등 구도는 결국 누가 더 큰 폭발력을 가졌는가(다이너마이트)로 종결된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거대 동성 집단의 침입에 기존의 고립된 남성 동성 집단의 대응은
 거의 유일한 무기이자 할리우드의 포장술인 인간애를 그림으로서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존 웨인의 도우미들의 면면을 기록해 보자.
늙고 다리가 불편한 월터 브레넌, 알콜 중독자인 딘 마틴, 보이스카웃을 연상시키는 리키 넬슨, 키 작은 멕시칸
 이상 4명의 면면들에서 이들은 감히 존 웨인이라는 거구의 동성애 상대로는 초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존 웨인이 극 중에서 자신보다 빠른 총잡이가 있음을 자인하고 거의 장총만을 고집하는 면모와 더불어
 멕시칸 호텔 주인이 빨간 여성 속옷을 존 웨인의 하반신에 걸쳐보고 그것을 엔지 디킨슨의 시각으로 확인시킬 때
 영화는 존 웨인의 정체성을 남성/여성 사이를 오가는 모호함으로 설정하고자 매진하는 듯 보인다.

전술한 존 웨인 측 남성들의 인간애 무기는 또다른 혹스적 세계와 접합하는데,
그것은 죽음이 거의 명백한 대결에서 오는 두려움 없는 매혹이다.
이미 굳게 봉쇄된 외부 남성 집단에 대응해 허술하고 불안한 남성 집단이지만,
그것을 두목 격의 이성애를 탈출구를 허용함으로서 승리의 윤리적인 이유로 제시하는 격투는
 그 자체를 반역적으로 읽는다면 도리어 고립된 남성 동성 집단 지키기라는 유희로 읽혀진다.

호텔 알라모라는 간판에서 존 웨인이 주연 감독한 "알라모 The Alamo(1960)"의
 역사적인 뻔뻔함을 선후관계를 떠나 우파적 기의로 읽지 않음이 가능하다면
 영화는 이 고립된 마을 드라마 속 존 웨인 측의 정의를 알라모 전쟁과 동일시하면서
 이들이 역사 속 알라모와는 다르게 왜 승리해야 하는지, 혹은 할 수 있는지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존 웨인의 주변 인물들의 완성되지 못한 남성성과 다이너마이트라는 거대 남성의 폭발력의 결합은
 영화 전반부의 승리해야만 하는 기대감에 대해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도래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마지막 대결에서 왜 다이너마이트는 그들 곁에 위치하고 그것이 사용되는지는 일종의 환타지이다.

문제는 왜 이런 환타지가 가능하고 허용되어야하는가에 달려있는데,
그것은 즉각 죽음에의 매혹을 가진, 여성과의 이성애라는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위장된 남성 동성 집단의 우월감과 도취에서 찾아져야한다.

딘 마틴의 알콜 중독이 떠나버린 여성으로부터 기인했지만,
그가 정상인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다름 아닌 보안관 존 웨인이 지배하는 남성 동성 집단으로 복귀한다는 뜻이며
 존 웨인이 그의 의상, 권총 등을 모두 미리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동료 이상의 애정을 의미한다.
영화 제작 당시 떠오르던 팝 스타였던 리키 넬슨이 19살이였다는 점에서
 그가 이 남성 동성 집단의 노쇠를 방지하는 젊은 피의 쌍권총으로 사용된다고 풀이될 여지를 남긴다.

영화 속 유일한 한 방은 바로 이 장면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존 웨인의 흐뭇한 웃음에서(그것은 자신의 성적 파트너들을 승인하는) 관객에게 감상적으로 전달되는
 가난하지만 그들만의 세계로 구축된, 마지막 대결 전의 남성들의 낭만적인 단합가 한 마당
 혹스가 전하고자 하는 웨스턴에서의 남성 사회의 뮤지컬 전환 시퀀스가 바로 그것이다.

딘 마틴의 목소리로 시작하여 월터 브레넌의 치아 없는 허허거림과 리키 넬슨의 독가로 끝맺는 노래에서
 존 웨인은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루지 않는다, 그는 다만 승인할 뿐이고
 이는 혹스적 세계에서 남성 전문가 집단의 두목들이 항상 취해야할 고정적인 자세의 진면목이다.

동일한 변주작품들인 "천사만이 날개를 가진다"와 "하타리"에서도 동일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노래할 수 있음으로서, 즉 예술성을 간직할 수 있기에 외부 남성 동성 집단에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위 합창이 굳게 닫혀진 보안관 사무실 안에서 타인의 시선이 부재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가난한, 위기에 처한, 죽음에의 돌진도 거부하지 않는 남성 집단 사회에 매혹이라는 혹스적 세계의 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견되었고 익숙한 게이 무비의 감미로운 낭만성은 이전의 완벽한 그들간의 짜임에 비해
 전술했다시피 다소 헐렁하고 그것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소 억지로 유지되어야한다는 강압이 엿보인다.
그것은 마지막 결투의 어이없는 승리가 그리 장쾌하다거나 논리적이지 않은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
승리했지만, 왜 어떻게 이길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승전보의 도착이야말로 혹스의 변화의 노림수이다.

마지막 대결이 끝난 이후에 도착한 이 부가적인 영상은 편집의 오류로 간주하기에는 마땅찮은 측면이 도사린다.
승리한 남성 두목인 존 웨인이 할리우드의 이성애의 현실적인 도취 악습인 20살 이상 차이의 연애관으로 복귀하여
20대의 앤지 디킨슨(그녀가 아직 신경증적이고 연약한 배우로 취급되기 전에)에게로 다가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극 내내 당당함을 잃지않았던 그녀가 존 웨인의 사랑을 갈구하며 확인받고자 하는 시퀀스 자체도
"천사만이 날개를 가질 수 있다" 이후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왜 쇼걸 복장을 입고 은유적으로 이전에 자기가 쇼걸 관련 일을 했다는 고백이 왜 필요한가인데,
마지막 시퀀스 자체의 전반적인 맥락이야 분명 쉽지 않은 여성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놓여있음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갑자기 이전까지 보여지지 않았던 쇼걸 복장과 대사로 밝혀져야하는지는
 다시 한번 "천사만이 날개를 가질 수 있다"와의 반복 연장선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혹스적 세계 안에서 여성들은 가끔 노래와 춤을 동반해야만 하는 쇼걸 직업일 때만 가능하다는 것은
 그녀들이 결코 남성 동성 사회를 확실히 위협하는, 즉 동성애를 거세시킬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이들이 그저 남성 동성 사회라는 은밀한 정체성을 노래와 춤의 향연으로 위장하는 역할에 머무름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이전까지 그저 도박사 정도로 소개되었던 엔지 디킨슨에게 갑작스런 쇼걸 복장이 입혀지고
 결국 벗겨진 이후 길거리에서 야간 순찰을 도는 월터 브레넌과 딘 마틴에게 던져지며
 그들이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도 말하지않고 웃음으로 그것을 승인할 때
 영화는 겨우겨우 숨을 고른 남성 동성 집단이 유지되기 위애 그녀를 초대했음을 고백한다.


 "리오 브라보"는 혹스의 남성들이 20년이 지나서 얼마나 흐트러졌는지, 그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쓴웃음이며
 허무한 액션과 낭만적인 노래로 동성애의 처연한 장막을 쳐버린 가련한 게이들의 집단 도취극이다.
4 saibi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3 feynmania
Thanks a lot for sharing.^^
5 Cinephile
감사합니다~~
3 Tera129
감사합니다
2 dtses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