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을 정리하면서
테크니컬러의 그나마
나은 화질의 웹립을 찾았습니다.
송구 스럽습니다.
리타 헤이워드
스튜어트 그레인저 주연
윌리엄 디텔레 감독의
살로메 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표현한 그녀의 춤이 유명하죠...)
원래 프리츠 랑 감독과 같이
독일에서 망명한 윌리엄 디텔레 를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길다(1946)로 세상을 뒤흔들던
리타 헤이워드 (34세)의 영화입니다. (자꾸 쇼쇙크가 생각나는 건...)
(쇼생크 탈출의 원작,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제목이
"리타 헤이워드와 쇼쇙크 리뎀션" 인건 다 아실테니...)
당시 단역 배우였던 마릴린 먼로도
이 영화를 보고 꿈을 키웠다고 하는데
당대 최고의 섹시스타를, 성경을 비롯한 역사상
가장 섹시한 댄서이자 팜므 파탈인 살로메로 만들어 홍보하고자 했던
포스터에서의 노력들을 살펴 볼까요?
역동적이고 컬러풀하며 장식적인 아르누보 디자인에서
정적이고 섬세한 고대 동전과 같은 상징적 아이콘적 디자인까지
이야기 그림같은 서사적 표현들은 물론
아래처럼 장면을 분할하여 이야기 내용을 강조한 고전적 포스터도
단순화된 형태와 색감의 모더니즘적 디자인까지
저는 아래처럼 틀에 딱 맞게 늘어놓은 정물적 구도도 참 좋아합니다
하지만 위와 아래처럼 아카데미즘 적인
회화적 형식의 그림들이 가장 눈길이 가는건 왜일까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그의 희곡 '살로메'에서 이 관능적인 춤을
그는 '일곱 베일의 춤' 이라고 묘사했죠.
세례 요한의 목을 걸고, 의붓 아버지 헤롯 왕을 녹여버린...
개인적으로 그녀를 광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놀라운 재능을 가진
한 시대를 풍미한 뛰어난 배우였다는점 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정자성 님의 자막을
릴에 맞춰 수정하고
쌍방 대화에 -표시 첨가
왕과 왕비, 왕비와 공주 간의 대화 어투가 뒤바뀐 부분
주인공와 배우 이름들
(Charles Laughton 찰스 라프톤-> 찰스 로튼)
일부를 교정하였습니다.
선 작업자께 감사를...
PS:
6년전 정말 매일을 낑낑 거리며
6개월 넘게 걸려 다시 쓰고 다듬었던 눈물나는 기억이...
이번엔 새릴에 맞춰 FPS
씽크 교정, 역시 수많은 마침표 제거
그래도 꽤많은 오타가 보이네요... ㅠㅠ
그래도, 훨씬 나아졌습니다.
릴은 1080p 2.05 GB mp4
Sendanywhere로 일주일 링크하오니
이 영화로 작은 행복 누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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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평 : 모자라는 보호막
어떤 숏에 대한 가상으로 시작해보자. 검은 배경, 두 뒷통수만 보인다. 프레임은 오직 머리부위만을
가로선으로 자른다. 여기에는 머리 외에는 다른 어떤 소품도 없다. 정확히는 그것이 참수된 결과인지
인지할 수조차 없다. 카메라가 서서히 후진하거나 혹은 작은 빛이 사선으로 출입하여 쟁반이 보일 때
비로소 관객은 두 머리가 이질적인 성격의 것임을 감지한다. 하나는 산 자, 다른 하나는 죽은 자의 것
하지만, 본편은 이같은 이분법의 파훼를 시도할 수 없다. 아직 거기에는 현대가 도착하지 않았다.
성경이든 소설이든 원형을 수정할 경우 이에 따른 대중적 호기심의 해석은 장황해질 수 밖에 없다.
이를 관통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은 여전히 리타 헤이워드라는 배우를 정신분석학적으로 고정함에
있다. 춤이나 등장 등 모든 이미지 자체를 원통이라는 거세적 남근성으로 지정한 이후 시선 권력을
은폐하거나 노출시킴으로서 그 경계선 위의 SM적 성과를 향유한 이후에 가장 안전한 대중의 좌석은
종교적 초월에의 귀의다. 엔딩에서 인물들이 군중에 속하거나 원근법적 구도 하에 잠식될 때 이같은
도식의 생존 전략은 정확히 효율성을 입증한다. 물론, 이는 당대 매카시즘에 대한 양가적 비상구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중첩이 아닌 연쇄로 포장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시선을 받는 자가 먼저
시점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전자와 후자가 각각 성/죽음에의 욕망이라는 이질적 공유성을
표면화한다면 욕망의 대상이 다른 충동의 시발점이자 회피자로서 주체화한다는 점이 본편의 거의
유일한 내심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쟁반 위의 참수된 머리는 그것이 언제 어디서 절단되었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은 위 맥락을 더욱 가중시킨다. 그것은 마치 예수의 전면 얼굴이 보여지지 얺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