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1939) William Wyler DVDRip.X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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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1939) William Wyler DVDRip.X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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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1939) William Wy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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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로맨스 / 미국 / 104분


감 독 : 윌리암 와일러

출 연 : 로렌스 올리비에(히드클리프), 메를 오베른(캐더린), 데이비드 니븐(언 쇼우),
          제랄딘 피츠제랄드


 

영국 소설가 E. 브론티의 작품. 1847년 발표되었다. 요크셔의 황량한 산지에 사는 두 가족의 3대에 걸친 이야기가 히스클리프라는 악마적 정열을 가진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 된다. 떠돌이 소년 히스클리프는<폭풍의 언덕>이라고 하는 저택의 주인이 데려다 키웠는데, 양부가 죽은 뒤 양부의 아들 힌들리에게서 모욕과 학대를 받게 되며, 양부의 딸 캐서린을 사랑하였으나 버림받고 집을 나간다. 3년 후 <폭풍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캐서린은 이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 뒤였다. 복수심을 품은 히스클리프는 에드거의 누이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하여 아내로 삼아 학대한다. 한편 캐서린은 그의 집요한 애증때문에 딸 캐시를 낳고 죽는다. 히스클리프는 옛 주인 힌들리를 굴복시키고, 그의 아들을 일찍이 자기가 받았던 만큼 학대한다. 그리고 캐시를 자기와 이자벨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무리하게 결혼시켜 린튼집안을 굴복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 복수심도 한계에 이르러, 마침내 캐서린의 환영을 보면서 죽는다.

'Wuthering'란 단어는 세찬 폭풍우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Wuthering Heights'는 저택의 이름이지만 글자 그대로 '폭풍의 언덕'에 있는 집이란 말이 된다.
브론테가 그린 세계는 구체적 현실세계인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 정신적 세계, 즉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융합한 영혼의 세계이다. 여기에서는 죽음 그 자체도 최후의 것이 아니라 영혼이 열리는 것에 불과하며, 죽은 자의 망령은 살아 있는 영혼과 신비적으로 교류한다. 요크셔의 자연풍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작중인물의 모순과 부조리도 깊은 시적 진실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작자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사회적 현실과 심리적 진실을 넘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하나의 비전이며, 가장 높은 시적 차원에서 발상된 비극적인 작품이다. 세계 10대소설의 하나로,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Comments

1 까치와엄지
스머프님, 고맙습니다.
잘 받아갑니다.^^
영화를 한번 봐야 하는데..
여태껏 안 보고 미루던 영화 중
한 편이네요.
'폭풍의 언덕'이 소설 속에
나오는 저택의 이름이라죠?
40 Daaak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22. 2. 24. 감상

단  평 : 어떤 장소에의 출입



생략에 대해서 말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원작으로부터 비롯된 바는 아니다. 오히려 이는 시공의

출입에 대한 금지로부터 생성된다. 가령, 본편이 초월성에 대한 비루한 굴종을 진술한다기보다

그저 주저라는 존재론적 모순을 기입하는 것에서 빈곤하게 연출되었다면 관객이 발견해야할 것은

보여지지 않은 지점에 대한 의문일 것이다. 남성의 탈주와 귀향 사이에서의 시공은 '미국'이라는

할리우드적 복수로 탈색될 수 없거니와 이는 여성의 행복한 결혼생활이라는 일상에도 적용된다.



문제는 여기서 남성/여성은 대사로도 증언되듯이 동일이라는 것에 있다. 영화는 이에 대해서 그

소멸된 시공의 지점들이 실재할 필요가 있는가를 반문한다. 포스트모던의 일상사는 19세기의

낭만주의 고전극을 기반으로 하는 본편에서는 무력할 따름이다. 이 지점에 있어서 카메라가

시선의 훔쳐보기 이후에 스스로 자격을 획득한듯이 창문을 통해 들어서고 나가기를 행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훔쳐보기를 했던 남성과 여성은 이제 그 창문 내부의 장소에 개입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카메라는 누구의 욕망으로 무엇을 본 것인가라는 질문을 도출하기 위해 스스로

출입의 유영을 증명한 바가 된다. 흥미롭게도 그 내부는 외부인으로부터의 일상의 파괴라는

웨스턴적 단초가 있다. 카메라가 관객을 대리하여 그 곳을 출입했다면 그것은 일종의 사디즘적

욕망을 발현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두말할 나위 없이 영화라는 매체의 익숙한 상업적

환상성으로서의 존재론이다. 폭풍 아래 바위보다 실은 그 반대편의 아늑함이 보기에 격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