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의 유언 (Le Testamanet D\'Orphee, The Testament Of Orpheus, 1960) 1080p.BluRay.x264-GHOULS

자막자료실

오르페의 유언 (Le Testamanet D'Orphee, The Testament Of Orpheus, 1960) 1080p.BluRay.x264-GH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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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판 블루레이 1:19:59 (h:m:s) 24fps 


- 블루립에 싱크 맞춤, 싱크 미세 조정, 싱크타임 긴 부분 분할

- 맞춤법 및 띄어쓰기 수정, 인명(지명) 수정

- 이탤릭 태그 삽입

- sub, sup: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 srt: 영어


* <시인의 피>, <오르페>에 이은 '시인 3부작'의 마지막 편이자 장 콕토의 마지막 작품 (오르페 3부작이라고도 함)

* 콕토 본인이 시인이기도 하고 아방가르드 장르라 관심 있는 분들만...

* <시인의 피> 블루립도 조만간 나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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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GIVE 3 MP 36 GuyPearce

추억의 밴드~!!!
38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S dreammaker
감사합니다.
S rayphie
고맙습니다.
31 백두
감사합니다.
S 인향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0. 8. 30. 감상

단 평 : 피와 꽃 그리고 연기

오프닝 타이틀이 제시되기도 전에 시작된 필름은 전작 <오르페>의 엔딩을 재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작의 엔딩을 보여주고자 함이 아님을 관객은 명확히 눈치챌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롤로그로서의 해당 영상의 주인공은 전작에서 자동기술로 작성한 시의 저자,
젊은 시인에서 프레임이 종결되기 때문이다. 롱 숏으로 사라져간 죽음들은 보여지지 않는다.
영화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젊은 시인이며, 그야말로 동행자이며 장 콕토의 거울 그 자체다.

굳이 거울, 장갑 등의 오브제를 부연할 필요가 없다면, 거의 유일한 본질로서 꽃이 본편을
관통함은 부인할 수 없다. 상상력이든 시인의 책무나 운명이든 뭐라 해제할 필요도 없이
꽃은 본편의 모든 시적 언어들과 실험들을 넘나드는 유일한 결과물이자 장 콕토 자신이다.
이는 장 콕토 자신이 본편에 직접 넘나드는 자로 등장함으로서 유언이라는 제명이 허언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만큼이나 간명하다. 그는 피카소, 로제 바딤, 율 브리너 등의 동료들과
더불어 막 발을 내디딘 누벨바그의 소년 장 피에르 레오를 초대함으로서 이를 확언한다.

꽃의 등식으로서 수미상관의 연기는 응축과 확산을 수놓으면서 예술의 자유를 논하는데,
이는 본편에서 장 콕토 자신이 편집을 통해 시공을 황량함을 산책하는 실행과 동일하다.
그는 이를 오프닝의 문장에서 '내 시대가 온다'라고 찬양하고, 이 유작의 작업에 대해 스스로
엔딩의 문장에서 자축하기도 한다. 그가 실질적으로 과학자의 시공간을 상대로 할 때
그는 영화가 기술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다시 그의 태반인 신화 속으로 걷는다.

전작에서 심판받았던 두 죽음이 11년이 지난 본편에서 심판하는 자의 위치로 전환됨은
단순히 영화의 자기반영성이라기보다 장 콕토 자신의 회자정리에 가깝다.  창을 던진
석상이 그러했듯이 명부로부터 집시들의 음악을 통해 귀환한 장 콕토는 눈을 잃는다.
보는 것으로서의 눈이 곧 상상력, 생명, 운명을 진술하는 가와 관련없이 마지막 그의
자리에는 꽃이 떨어진다. 그의 신분증이 꽃이 될 때 다시 흑백이 된 꽃은 젊음을 다시 불러들인다.
자신보다 한살 많은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가 연상되는 직립의 묘기가
몬테이로의 <노란 집의 추억>에서 승계되듯이, 본편의 엔딩에서 6년 뒤 안토니오니의
<욕망>을 추출해낼 때, 영화사가 구축됨이 아니라 장 콕토의 꽃의 만개를 배웅하게된다.
18 redondo
정말 엄청나게 난해 하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