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유언장 (The New Testament, 1936)

자막자료실

새 유언장 (The New Testament,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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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신청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사샤 기트리 팬이라서 작업했습니다.

이전에 번역했던 <왕관의 진주>와 <어느 사기꾼 이야기> 만큼은 아니나,

기트리 희곡을 재미나게 영화로 만든 겁니다.

역시나 젊고 아름다운 부인도 공연하고요.


불어==>영어==>한국어 중역이라

영자막만 갖고는 어딘가 문맥이 어색한 부분이 가끔 있습니다만,

중역의 한계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프랑스인들이 개인의 연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영화입니다.

당시에는 그래도 '간통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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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감사합니다~~~
19 큐담
수고하셨습니다
S rayphie
고맙습니다.
S 인향
고맙습니다.
38 보라™
수고하셨습니다^^
29 언제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GIVE 5 MP 10 cinephile001
수고하셨습니다. ^^
GIVE 10 MP S 궁금맨
고맙습니다.
28 이야호
고맙습니다
16 진주
감사합니다.^^
30 하얀벽돌
자막 제작 감사합니다.
얼마 전 루이 말의 <밀루의 5월>을 보다가 이 영화가 장 르누아르에 대한 찬사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프랑스 감독들은 특히 자신의 영화에 선배 감독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데 익숙합니다. 작년에 개봉된 영화 중 주목할만한 작품으로 엠마누엘 무레 감독의 <러브 어페어 :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은 명백히 사샤 기트리의 영화 연출 방식을 모방한 것인데 거기에는 기트리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 있습니다.
기트리 영화는 상업적 성공은 거두었으나 비평적으로는 ‘깡통 극장(canned theatre)라고 무시 되었지요. 깡통 극장이라는 용어는 초기 토키 영화가 마이크 사용의 제약으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연극적 형태를 혹평하는 용어였습니다. 기트리를 재조명한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 이 잡지는 기트리의 마지막 세 작품에 찬사를 보냈고 초기 작품을 상영하였습니다. 기트리에 대한 평가가 결정적으로 바뀌는데에는 알랑 레네의 결정적 한 방이 있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크리스 마르케, 고다르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그것이지요.
2019년에 기트리 특별전이 영화의 전당에서 있었습니다. 그 때 <새 유언장>을 봤는데 이제 또다시 보게 되었네요. 좋은 작품 번역 감사드리며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6 shhong70
고맙습니다.
29 불량아이
고맙습니다.
20 엽전
감사합니다
1 팝코니스트
사샤 기트리 영화는 이번에 처음 봤는데 재밌으면서도 신기한 영화였네요. 덕분에 잘 봤고 과거에 umma님이 번역해주신 자막도 찾아봐야겠군요. 감사합니다!!
3 DocKing
감사합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Sacha Guitry 감독도 새로 알게 되었네요.
40 Daaak
감사합니다.
1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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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umm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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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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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컷과송
2022. 8. 18. 감상

단  평 : 뭐라 하든 어디든,  맞다

흥미롭게도 실내극인 본편에서 유일하게 두 번의 실외를 허락받은 이는 오히려 난장과
개방의 무대에서는 슬쩍 제외된다. 이는 영화적으로는 프레임 밖으로의 추방인데, 서사는
그에게 어떤 처방전도 조제하지 않는다. 아들뻘인 그와 밀회한 아내에게는 작은 밀알같은
어조를 건네는 인물은 완전한 관계의 해제를 주술하기 전에 재차 젊은 남자를 퇴출시킨다.
말하자면, 그는 이 복잡한 거미줄에 굳이 매달렸다가 자의로 탈출할 여력도 없는 존재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관객이 주의를 기울여 시청하지 않는다면, 잠시 한순간 두 자동차를
하나로 착각할 수 있는데, 물론 이는 의도된 바다. 음성뿐인 인물은 차량 내 후사경에서
보이지 않는 반면, 다른 차량의 불륜 남녀는 정확히 보이는데 차량 내에서 끝까지 남은
이는 젊은 남성 뿐인 것으로 추정하도록 유도된다. 후반부 그는 약속 장소가 잔 다르크
동상 근처인 것만 알고 파리 곳곳의 잔 다르크 동상을 헤매고 다님으로서 중의적으로
뒤엉킨 관계의 중심에서 주역이 되지 못하면서도, 모든 잔다르크의 가능성을 증언한다.

즉, 잔다르크라는 프랑스적 기의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만남이 성사되지 않음으로서
부실한 기표로 추락하는 듯 하지만, 애당초 그같은 관계 자체가 그저 해프닝일 뿐임을
진술함에 있어 굳이 우연과 상상이 필요하지는 않다. 초반부에 보이듯 하인의 이름은
어떻게 불리든 하인이며, 비서의 진로나 가족 관계 등도 그다지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건이 관계를 파국화하지 않고 간단히 봉합될 때 그것은 어쨌든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