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1943) Sam Wood

자막자료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1943) Sam 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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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두 다 보았을 영화를

새로 자막을 만드는 사람이 저 말고도 있군요.

(오래전 올린 자막을 다시 한번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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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신부님이 조종(弔鐘)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그걸 궁금해한 한 사람이 하인을 보내 물었습니다.

"신부님, 누가 죽었나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시나요?"

신부는 대답했습니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일 뿐.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흙 한 덩이가 바다에 씻겨 가도,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유럽은 더 작아진다. 그건 벼랑이 깎여 나가도 마찬가지이고,
as well as if a mano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네 친구의 땅이나 너 자신의 땅도 마찬가지이다.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다.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왜냐하면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그러니 누구를 위해서 저 종이 울리는지 알려 사람을 보내지 말라.
it tolls for thee.                                                                  그것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일지니.

 

영국의 성공회 신부이자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의 시 전문 입니다. 

그의 시처럼, 조종은 죽은 사람을 위해 죽음을 애도해서 울리는 걸까요?

아닙니다, 살아있는 우리를 위해 어떻게 살다가야 하는지 알려주기 위해 울리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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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1936-1939)을 배경으로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42세의 게리 쿠퍼 와 28살의 잉그리드 버그만 의 대표작입니다.


저는 그 어린 나이에, 로베르토를 부르는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정말 며칠 밤을 뒤척인 경험이 있습니다.(너무 안타까워서 정말 다리가 부러지면

말을 탈수 없는건지, 어른들에게 몇번이나 물어 보았죠.  당시, 별로 신통한 대답도 못들었지만...

지금은 압니다, 계속적인 진동에의한 통증으로 실신해 버릴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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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멋진 우리의 게리 쿠퍼는 그렇다치고
이 짧은 머리에 의상비 전혀 안든 잉그리드 누님은 어떡하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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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라스트씬까지...
이 천진한 웃음과 그녀의 모습은 제가 마지막 눈을 감을때도 떠오를것 같습니다.
(40년만에 봐도 뭉클하니, 종은 저를 위해 울렸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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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렇게 찾아헤메던 중, 그래도 그나마 최고의

블루레이 릴을 얻고는 기뻐했는데, 자막이 너무 엉망이었습니다.

씽크부터 도무지 엉망인 딕테이션 자막을, 영자막(역시 충실하진 않았지만)으로

수 개월에 걸쳐 부족하나마 한줄한줄 다시 제작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이 영화에 대한 저의 사랑과 감사를 대신합니다.

(내용 전달만큼 중요한 문학작품 이기에...

적어도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자막이 있어야 했기에...)

영상은 2.37 GB mp4 이며

Sendanywhere로 일주일 링크 합니다.^^

즐감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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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S BJCool
대단히 감사합니다
5 世羅飛™
고밉습ㄴ;다
18 cory7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3. 1. 31. 40여년만의  재감상


단 평 : 승리하는 어둠


먼저 말하자면, 오프닝 해설 자막의 싯구를 빌지 않더라도 전작의 '나'를 위해서는 이제
'그대'를 경유해서 인류로서의 '우리'에 도착한다. 문제는 원작의 결이 종종 과잉되게 묻어난
본편에서조차 '우리'라는 개념을 부정 또는 파괴한다는 것에 있다. 철저히 웨스턴으로
접근하고 외국인(그것이 미국이든 영국이든)으로 호명됨에도 고전적 정의가 완성된다는
진술이 성립되지 않음은 부인할 수 없다. 가령, 남는 것은 외부인이고 공동체가 떠난다.

동굴을 곧 여성으로 기호화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해당 저항집단의 기존 우두머리에
대한 냉혹한 폐기는 고전 할리우드에서는 희귀하게도 전혀 징벌되지 않는다. 동료들을
살해하거나 작전을 방해하는 등의 이질적인 존재임에도 생존 안에서 그는 지속되어야한다.
단순히 '된다'가 아니라, '어야한다'라는 어미의 강조는 본편이 낭만의 숭고미를 지향함에도
서사의 결에서 오히려 그같은 과시보다는 뒤섞임의 모순 하에서 세계를 회의함에서 비롯된다.

전작에서 무용수들의 춤과도 같이 본편에서 흥미로운 단락은 플래쉬백을 통한 처형극인데,
선악 구별보다는 파시즘적 광기가 주저앉음의 동작을 통해 입증된다. 그 반대편임에도
동질적으로 본편이 내내 파스텔톤의 감성적 풍광을 배우들의 얼굴과 중첩시켜 생성되는
이미지는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패배적 향취를 마주하게한다. 오프닝에서 투사들의 얼굴이
그러했듯이 종종 인물이 어둠이 되어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시 죽음이고 역사다.
S 줄리아노
^^
1 진홍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