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졸라를 참 좋아했던
젊은 시절이 생각나네요.
이런 명작을 무슨 엉터리 같은
영화 "박쥐"에 비교한다면
에밀 졸라나
마르셀 까르네 감독도 속 터지겠죠.
시몬느 시뇨레, 라프 발로네 주연의
떼레즈 라껭 입니다.
PS:
다시 한번 감상후 누락 부분, 오타
들쑥 날쑥의 씽크를 영문과 비교하며
완전 수동으로 칼 교정한 (정말 싫타...)
간단치 않은 작업 입니다.
(정말 씽크들은 왜 이리 엉망인지 모르겠군요... ㅠㅠ)
릴은 1.99 GB mkv로
Sendanywhere 7일 링크 합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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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와 <떼레즈 라껭>에 대한 언급에 격하고 공감합니다. ㅎ
추카추카 35 Lucky Point!
힘든 작업이실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 평 :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멜로가 과학의 구조화인지 혹은 구조의 과학화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지난한 논쟁을 요한다. 이는
과학과 구조의 개념에 대한 부차적인 언술로까지 범람하게된다. 마르셀 까르네의 세계 내에서
주요한 것이 인물인가 아니면 장소인가를 질의함에서 비롯될 전술한 논제들은 30년대말과 전후의
기준점 아래 죽음의 대상자를 달리한다. 종전 이후 심판은 내부의 핵보다는 변방의 희생양으로서
지목될 윤리적 책임으로 빗겨나간다. 물론, 남겨진 중심 역시 변증법적 회귀가 아닌 고립화된다.
자연주의가 보수주의일 수는 없겠지만, 본질주의의 멍에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본편에서 이같은
장벽을 두텁게하는 바는 감독의 군중이라 할 수 있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무엇을 바라보는 군중의
뒷모습들을 포착하고 엔딩에서 군중은 감히 장소 안으로 범람하지 못하고 문 밖에서 인물의 광경을
응시한다. 그들은 결코 거기에 간섭하지 않지만, 거기에 마치 준비하고 재판하듯이 실재한다. 수미의
카메라가 도심의 정경을 동일하게 담아내는 이유 역시 동일하다. 장소라는 본질은 곧 과학이 된다.
이에 반해 인물 단독의 응시는 부정된다. 기차에서 증인이 상황을 인지했는지는 분간되지 않거니와
시신을 보는 인물은 고개를 돌린다. 노려보는 두 눈으로서의 시어미의 존재론 역시 급격히 소멸된다.
흥미로운 것은 죽음들과 유사 죽음이 있음에도 그것이 장소를 붕괴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인물들은
어떤 측면에서든 유보된다. 직접 개입이 아닌 연기라는 장막은 오히려 구조의 영속성으로 악랄하다.
진정으로 실재하는 바는 행하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구원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