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사빠 줄리아노는
짧은 영화 한편으로 그녀에 빠져...
금방 궁금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녀 집 주소 입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2117038
써스펜스 (Suspense 1913) Lois Weber
그리하며, 찾아 본 만만찮은
두 편을 작업해 올립니다.
코트니 푸트 주연
로이스 웨버 감독의
위선자들 입니다.
(Hypocrites 히퍼크릿츠 Hypocrisy 히퍼크러시 (위선)
그야말로 거짓 선, 착한 척하며 뒤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자 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체코 화가 알폰스 무하 풍의 포스터
영화는 매우 정적인 화면에 사색적인 내용을
주인공들을 중세와 현대의 일인 이역으로 교차 구성하였으며
"진실" 이라는 개념을 벌거벗은 젊은 여인으로 의인화 하여
2중 노출이지만 과감하게 초창기 누드를 선 보입니다.
당시 매우 센세이셔널 하였고, 뛰어난 인물 들의 개성을
거의 완벽한 구도 속에 정렬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조금도 주저하거나 흐트러짐 없이 잘 드러냅니다.
(역시, 당대 최초 최고의 여자 감독에 손색이 없네요)
오늘 아침 제 설교문은
마태복음 23장 28절 내용입니다
"겉으로는 의롭게 보여도
안으로는 위선과 악행이 가득하도다"
"화 있으리, 위선의 서기관들과 바리새 인들아"
...............................................................................
"위선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보이지 않는 유일한 악이다" - 밀턴
진실은 참으로 신성한 주인과 함께 세상에 와
보기에 가장 영광스런 완전한 형태였지만
그 분이 승천하시고 따르던 사도들이 잠들자
바로 미혹하는 악한 종족이 일어나
진실의 순결을 빼앗고, 그 사랑스런 형상을
천 조각으로 쪼개 사방으로 흩었노라 - 밀턴
진실의 빛이 위선자들을 쫓는 중간 삽화
그녀의 누드가 당대의 큰 센세이션 이었던
"진실" 역의 고전 무용수 마가렛 에드워즈
로이스 감독님, 존경합니다!!
PS:
우리나라 3.1 독립 만세
운동도 있기 전에 영화는 장면 장면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그러면서도
곳곳에 감독의 냄새가 묻어나는 듯한
참으로 흥미롭고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구석 구석 놀라운 장면들의 연속 입니다)
역시 매우 어렵게 구한 릴은
블루레이 리먹스 1080p 1.71 GB mkv 이며
트래픽 없는 Naver 로 7일 링크 하오니
백년이 훨씬 넘은 이런 작품을
누가 관심이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물상의 골동품을 뒤져 보신 분이라면
그리고, 그 즐거움을 아시는 분이라면
감히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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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스펜스도 흥미롭게 봤는데 이번 작품도 기대됩니다!
영상 공유까지 정말 고맙습니다!
단 평 : 들여다보는 카메라
지가 베르토프만큼이나 카메라의 절대적 권능을 신뢰하지 않고서야 본편과 같은 과감한 벗음의 벗기기를
주체화할 수는 없다. 실제로 비가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시적인 누드 형체(생물학적인 성별로 호명함을
주저하게 되는 것은 성직자로서의 남성과 진실의 인도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이분법의 조합에 대한 배제다)는
돋보기에 가까운 손거울을 무기처럼 활용함으로서 이면을 노출시킨다. 이 때 대상을 비추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게는 인지되지 않음에 착안한다면, 카메라는 시공과 물체에 대한 초월적인 권위를 내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카메라로서의 인도자가 왜 누드화된 여성이어야하는가에 되어서는 종교인 복색의 남성과 대비에
대해 진술을 거부할 수 없다. 제목 그대로 위선이 진실의 단순화라는 서사적 희열 안에서 속박될 때, 이를
당대의 포스트 모던적 시선으로 평가할 때 해당 누드의 용기는 가상함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는 당대를
어떻게 진단하는가의 논제이기도 하다. 1차 제국주의 세계 대전 하에서 본편은 어디에서도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는 단언을 제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또한 진실에의 욕망인가는 모호하지만, 카메라는 결국 퇴장했다.
초반부 광장에서의 조각 예술로 진실이 대중에게 전시된다는 점은 극장화가 도래하기 이전의 영화의 위치와도
다르지 않다. 1910년대 영화사에서 스펙타클과 환타지로서의 영화가 아닌 윤리적 고발로서의 필름이 재생됨을
고집한 본편은 중세와 당대를 동시화함으로서 회의주의를 영속화시킨다. 특히, 눈망울 속의 초상을 클로즈업한
프레임에서 영화의 또다른 자세를 탐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벗음으로서의 카메라가 벗겨내기의 공격적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은 중립적일 수 있는지 본편은 침묵한다. 초월의 타자화에는 어떤 구원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