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라는 단어는 아직 섣부르지만, 본편에는 장갑, 거울을 통한 이동이 있다. 전작의
백마가 자동차로 변경된 것 외에 추가하자면 환타지의 저편으로서의 죽음은 구조화된다.
여기서 구조는 문서로서의 서명-증거를 채책하고 집행하는 관료제를 지시하는데,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반대편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형사 등이 등장하지만,
그 곳이 하나의 장소성을 내재하지는 못한다. 그저 미제가 경유되는 공간에 불과하다.
신화의 재해석으로서 본편이 적극적으로 반역한 지점은 죽음의 주체화다. 기존 서사에서
죽음이 주관화된 객관성으로 유괴자의 타자성에 머물렀다면, 본편에서 장 콕토는 죽음이
스스로 삶에 이끌려 생의 귀환이라는 자기 파멸을 하는 비극의 미학을 주입한다.
문제는 여기서 주체라기보다 거의 노예나 빙의된 존재로서의 객체가 된 시인의 존립가능성이다.
시인으로서 오르페와 그의 아내 유리디스는 왜 죽음'들'의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본편은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대중에게 혐오되는 시인의 자리가 보족된다.
결국 본편은 죽음과 삶 사이에 시인의 존재를 임신으로 영속화시키지만, 정작 밖과 안
어디에도 긍정의 시야를 열어놓지 않는다. 결말부에 어색하게도 급속도로 시인 부부의
관계가 재설정되지만, 그 반대편 명부의 소멸 농도를 진한 대비를 위한 소비에 가깝다.
정작 문제는 시인의 시를 누구도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때, 관객은 예술의 특권 즉
영원히 생사 이분법을 산책할 수 있는 재능이 현실에서의 배제 외에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추정할 수 없음에 있다. 신화는 20세기 전후에 이르러 죽음의 주체성을 오히려 추앙하고
그것이 살아남은 자를 위한 축복이라는 재전유 앞에서 희비극이 된다. 오르페는 행복하다.
단 평 : 배제라는 특권
여전히라는 단어는 아직 섣부르지만, 본편에는 장갑, 거울을 통한 이동이 있다. 전작의
백마가 자동차로 변경된 것 외에 추가하자면 환타지의 저편으로서의 죽음은 구조화된다.
여기서 구조는 문서로서의 서명-증거를 채책하고 집행하는 관료제를 지시하는데,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반대편은 아예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형사 등이 등장하지만,
그 곳이 하나의 장소성을 내재하지는 못한다. 그저 미제가 경유되는 공간에 불과하다.
신화의 재해석으로서 본편이 적극적으로 반역한 지점은 죽음의 주체화다. 기존 서사에서
죽음이 주관화된 객관성으로 유괴자의 타자성에 머물렀다면, 본편에서 장 콕토는 죽음이
스스로 삶에 이끌려 생의 귀환이라는 자기 파멸을 하는 비극의 미학을 주입한다.
문제는 여기서 주체라기보다 거의 노예나 빙의된 존재로서의 객체가 된 시인의 존립가능성이다.
시인으로서 오르페와 그의 아내 유리디스는 왜 죽음'들'의 애정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본편은 명확히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대중에게 혐오되는 시인의 자리가 보족된다.
결국 본편은 죽음과 삶 사이에 시인의 존재를 임신으로 영속화시키지만, 정작 밖과 안
어디에도 긍정의 시야를 열어놓지 않는다. 결말부에 어색하게도 급속도로 시인 부부의
관계가 재설정되지만, 그 반대편 명부의 소멸 농도를 진한 대비를 위한 소비에 가깝다.
정작 문제는 시인의 시를 누구도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때, 관객은 예술의 특권 즉
영원히 생사 이분법을 산책할 수 있는 재능이 현실에서의 배제 외에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추정할 수 없음에 있다. 신화는 20세기 전후에 이르러 죽음의 주체성을 오히려 추앙하고
그것이 살아남은 자를 위한 축복이라는 재전유 앞에서 희비극이 된다. 오르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