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춘 마리안느 (Marianne de ma jeunesse, 1955) Marianne of My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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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춘 마리안느 (Marianne de ma jeunesse, 1955) Marianne of My Y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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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님이 올려주신 2장짜리 자막을 병합하고 싱크 수정햇습니다.


한영sub2smi:ka2h



 

Comments

S 컷과송
2023. 7. 29. 감상


단 평 : 소년은 두렵지 않다


시간은 시대를 이루고 그 내부에서 시선은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을 경유하여 다차원적 좌표를 취득한다.

기존의 본질들은 기꺼이 환타지로 폐기되고, 그것이 존속할 수 있었던 예의의 자세는 유년으로 축소된다.

가령, 2011년 <케빈에 대하여>가 어떻게 2023년 <보 이즈 어프레이드>로 응징 확장되는가를 상기하면

위의 맥락은 인지가능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본편은 전후에 여전히 다소 퇴행적인 오이디푸스의

경로에 집착함으로서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것에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영웅화한다.


인물이 외부에서 유입되고 도착한 곳에 이미 공동체가 남성 소년들만의 공간(여성 노동자는 없다)으로

지정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동성애적 공포를 차단하기 위해 서사는 외부인의 첫 등장에

자동차 창 밖의 손만으로 어머니/여성을 은밀하게 상징화시킨다. 즉, 인물은 유일하게 어머니/여성을

호명할 수 있는 단독자이기 때문에, 학교라는 무력한 장소에서 거의 규정 밖을 외유할 수 있다.

갑자기 투입된 여자 소년은 무리하게도 인물을 우상화하지만, 끝내 경쟁하지 못하고 소멸된다.


문제는 50년대 중반에 여전히 본편과 같은 오이디푸스를 초라하게 가장한 자연으로의 회귀가

필요한가에 놓일 것이다. 전후 프랑스가 아르헨티나를 식민지적 향수로 호명하지 않았다고해도

인물을 영원히 상상계 내부에서만 혼령처럼 떠돌게할 때, 그것이 현실 내부에서 유효할 가능성은

본질주의의 남근적 환타지 외에는 없다. 마리안느가 초상화와 텅 빈 거울 밖의 이중적 존재로

첫 등장할 때의 매혹이 인물 밖의 사회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저 개인의 일탈에 불과하다.

이같은 시선이 다소 비정하고, 단절적인 입장이라해도 당대 페미니즘의 의지에 동참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