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 (Ivan's Childhood , 1963) Andrei Tarkovsky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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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 (Ivan's Childhood , 1963) Andrei Tarkovsky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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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번역해 주시길 부탁 합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 Ivanovo Detstvo (Ivan's Childhood , 1963) Andrei Tarkovsky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넘어.







우리 ‘Feel林’은 우리스터디 ‘ArtAcademy’와 연계하여 3월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달로 잡고



그의 작품 4편을 준비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감독과 만나는 이 자리가 참 소중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보다 더 소중한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의 영화를 만나고 느껴야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서지 않으면 그의 영화를 철저히 분석하고, 온 몸으로 느낀다 해도 그것은 그저



자기만족-지적허영심만 한 짐 느는 꼴입니다.



그 짐을 우리 걸음걸이를 멋있어 보이게 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가볍게 할 순 없습니다.



그의 영화보기에 앞서, 이 글을 읽기에 앞서 한 번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과 제가 있는 이 위치에서 그의 영화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말입니다.



그것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타르코프스키를 넘어 더 나은 영상예술 시대를 열어 가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다 세우고 들어가라.







영화사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위치는 독보적입니다. 또 반면에 지루한 예술 영화의 대표로 꼽히기도 합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여러 영화 평론가와 철학자들에 의해 너무 많은 텍스트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느끼고 사유할 관객을 몫을 빼앗은 게 사실이며,



여러 면에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을 신성화 시키는데도 일조했습니다.



영화와 만나기도 전에 미리 허리 숙이고 굽실굽실 들어가면 어떤 예술 작품도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화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시 모든 예술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매우 미안하게도 모든 천재들은 단순합니다. 그 단순함에 도달하지 못하는 해설자들이 주석을 붙이고, 부풀리고 또는



왜곡시키는 작업은 비단 타르코프스키 영화에만 포함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와 일 대 일로 만나지 않는 한 내가 타르코프스키가 되어 영화를 보지 않는 한 영화 읽기는 무척 힘든 일이 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타르코프스키는 기존에 있었던 영화문법에 대항했고, 그것을 전복(顚覆)시키려한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여러 글에서 기존 영화가 소설이나 연극에서 차용한 드라마투르기나 상징적인 표현들에 불쾌감을 표현하고,



영상은 오직 자신만의 언어로 새로운 영상예술의 역사를 열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영화를 보아왔던 방법이나 습관으로 그의 영화를 읽는다는 건 무리이며,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키게 되고 그로인해 그의 영화에 대한 너무나 어렵고 또 기발하기까지 한 해석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새 술을 옛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찢어지듯,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또한 그의 영화역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방법이 아예 우리가 모르고 있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근육은 아닙니다.



바로 내가 가지고 태어난 ‘느낌’이라는 근육이 그것입니다.









 






이반의 어린 시절.







그의 처녀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은 일정 부분 이런 논의의 예외로 봐야합니다.



이 작품은 막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제작한 신인작품답게 그의 일곱 편의 작품 중 그나마 고전적인 영화 형식이 남아있으면서



타르코프스키만이 가진 영화세계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타르코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현실 그대로를 옮기기 위해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Feel林’모임에서 분석했듯 이 영화는 예외에 속합니다. 특히 이 영화의 오프닝은 아주 정교하게 잘 짜여 있습니다.



다음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레프>만 가도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형식적으로 짜인 프레임에서 탈피하고



그저 자기 안에 있는 영상 그대로를 프레임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반의 확고한 신념과 행위 중심적 성격은 ‘행위가 곧 인물’이 되는 고전적인 작법에 부합합니다.



반면에 그의 영화 속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언어적인 성격 또한 같이 지니고 있지요.



영화 속 내러티브 역시 앞 뒤 설명 없이 이반을 전쟁 한가운데서 몰아넣습니다. 이런 설정은 전쟁영화가 가진



기본 문법을 이용하면서도 전장(戰場)상황보다도 휴전상황 속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연출을 통해 우리는 ‘어린 이반’의 자아를 드려다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물에 갇힌 별, 어린 이반.







우리가 보는 이반의 겉모습은 너무나 나약하고 외로운 존재입니다. 영화 속 이반을 설명하는 첫 대사 역시



“몸이 안 좋은 건지 그런 척 하는 건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반의 내면은 복수로 가득 차 있으며



잠꼬대조차 없이 모든 슬픔을 혼자 참아냅니다. 말투, 행동, 눈빛 모두 어른 같고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말합니다. 이반은 이렇게 겉으로는 쉽게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안으로는 강한 신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신념은 올바른 것일까요? 이반은 누구에게 복수하려 하는 걸까요?



그리고 원래 이 아이가 이 나이 때 꾸어야 할 꿈은 무엇일까요?





 

 













르는 영화를 통해 이반이 세상이라는, 인간이 만들어 낸 전쟁이라는 ‘우물에 갇힌 별’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대사는 전쟁은 여자나 어린 아이가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 전쟁은 아이, 어른,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린 이 작품을 통해 타르가 말하고자 하는 전쟁이 단순히 총 칼이 동원되는 전쟁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내 호흡이 먼저다.



내 호흡이 먼저다.







어떻게 보면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읽는 근육이 아직 부족할지 모릅니다.



그이유의 첫 째로는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왔습니다.



‘카메라가 왜 저렇게 이동했을까?’ ‘왜 바람을 이쪽에서 저쪽에서 불게 했을까?’



'왜 저곳에 문을 두었고,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일까?'



이런 분석법을 나무랄 수 없는 게 기존 영화 분석은 대부분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런 분석방식과 습관을 빨리 버려야 합니다.






둘째는 안타깝게도 우린 우리 내면을 둘러볼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문화는 나의 존재, 내 영혼을 안아보는 시간을 빼앗았고



스스로 자기 손을 잡아보는 기회조차 드물게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내가 가지고 태어난 ‘느낌’이란 근육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느끼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타르코프스키 영화 호흡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호흡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죽지 않고, 별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어린 이반’의 냉정하고 비참한 시절을 통해 인류가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해주며



그의 영화가 한 결 같이 그렇듯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또 후대의 관객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Feel林’은 아름다운 것, 영원한 것, 신성한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이라 믿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 달간 타르코프스키를 느끼는 시간이 곧 스스로와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첫 영화에서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이어지는 나무 한 그루에 대해



한 시인의 시를 빌려 이번 리뷰를 마치고 싶습니다.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책까지 낸 한 철학자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죽은 나무가 그의 유작 <희생>에서 다시 살아나기까지 무려 24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멋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우리 느낌은 조금 다릅니다.







한 달 동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상을 통해 나와 세상을 만나는 좋을 기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 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고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 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
 

Comments

1 블루피아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