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고 사탕수수밭에 한 남자, 침략자에 속아 도장을 찍고, 일을 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두 아이와 사탕수수밭. 하지만 사탕수수밭은 그의 것이 아니다.
죽을 힘을 다해 일하지만 그 땅은 침략자가 팔아버린다. 집? 그런것은 침략자의 상관이 아니다.
사탕수수에게 이제는 네가 날 살릴때라며 정성껏 돌보았던 그.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의 연속이었을 뿐이었고, 그 거짓에 희망을 걸였으며, 그 희망은 거짓으로 변해버렸다.
아이들에게 돈을 주며 놀다오라는 그의 모습은 아버지이지만 속은자요, 돈을 좀더 달라며-놀러간다는 생각에 들뜬 아이들의 모습은 그저 아이들일 뿐이다.
아이들이 그 돈을 들고, 음료수를 사먹고 노래를 듣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다른 빼앗긴자들은 돈을 많이 벌었나보다, 며 넌지시 말을 던진다. 이 모습이 우습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했다.
아버지이자 속은자의 뒷모습, 그 사탕수수들을 마구 베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모습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분노, 연민 그 무엇이라도 좋다.
그리고 쿠바의 한 여자, 그 여자를 좇아오는 침략자 - 해군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은 최고가 아니다. 그저 침략자일 뿐이다.(해군들은 자신들의 침략을 찬양?했다, 망나니의 모습으로.)
그리고 그 여자를 구하는 한 남자. 하지만 이내 영화는 그 남자의 모습에 주목한다.
바티스타를 암살하려 하지만 그때 그의 귓전을 맴도는 것은 쿠바의노래이고, 시야에서는 바티스타와 식사를 나누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왜 쿠바는 그의 귓전을 맴돌며 괴롭힐까, 아니 어쩌면 괴롭히고 있다며 그 자신 스스로 받아들이는 문제인가. 성급히 움직이는 그의 모습에서 긴장감이 일었는지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동료들은 죽고, 그도 죽는다.
한마리 죽은 새를 들고, 그는 지도자가 되어 앞을 선다. 하지만 죽는다. 한번, 두번, 세번... 꽝!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아니 재미도 안되는 것처럼 하는 경찰-또 다른 침략자.)
그가 죽는 혁명의 광장에서, 그의 장례식 행렬에서 보이는 쿠바의 한 여인은 그 모든 쿠바인의 한 모습이었다.(그 여인은 앞에 해군들에게 좇긴 여인)
쿠바의 국기를 내걸고, 발코니로 나오는 노동자들, 사람들... 아름다웠다. 눈물이 그저 흐르도록.
앞서, 바티스타 암살을 실패하고 돌아와 터널을 지나는 그 젊은이의 모습에서 그 지나가는 이가 나인것만 같았다. 광장에서 쿠바의 모습과 이 장면이 너무나 강렬하게 남았다.
소이쿠바, 내이름은 쿠바이다. 나는 쿠바이다. 그 무엇도 아니고 그저 나일뿐이다.
그 어느것으로 이름지을 수는 없다. 나는 쿠바이다.
유혈혁명은 잘못된것일 수도 있다. 평화만이 방법일 수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카스트로 -게릴라를 정당화 할 수 있다.
어떠한 방법이든, 인간이 살아가는 한 혁명은 불가피하다. 이점에서 이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싶다. 그리고 등장하는 모든인물들, 음악, 바다, 그 모든것들이 쿠바 그 자체였다.
세계의 명화, 말 그대로 세계의 명화였다. 흑백영화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흑백이었기에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너무나... 도 아팠다... ...,
시가의 아련한 연기에서 흑백의 쿠바가 피어오르는다.
그 쿠바의연기가 단어를 만든다. SOY CUBA
등장인물마다 이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 만큼은 그들에게 쿠바라는 이름을 주고싶다. 그래서 그 각자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바티스타와 카스트로의 이름을 언급한것은 나도 모를 무슨 심리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