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기요코와 불협화음 가득한 그의 가족은 동경의 시타마치 지역(시내의 한구역)에 살고 있다. 23살인 기요코는 아직 관광버스 안내원이지만 더 많은 것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레코드를 듣는 하숙생인 카쓰라에게 고무된 탓이다. 어느 날 이복자매인 미쓰코의 남편이 죽고 막대한 보험금을 남기게 되면서 가족들은 거대한 싸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또 다른 이복자매인 누이코는 보험금을 얻기 위해 기요코를 천박한 빵집주인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결국 기요코는 교외로 빠져나와 한 늙은 과부의 집에 방을 얻는다. 거기서 그녀는 음악적 감성이 풍부한 남매와 친구가 되는데, 그녀는 그들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갈망하던 사랑으로 충만한 가족을 발견하게 된다. (서울시네마떼끄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에서)
어원과 고양이에 종속되자면, 본편은 전작 <밥>에 연결된다. 벼락에 의해 쌀이 익는다라는 뜻과 아내/처의
맥락이 고양이와 더불어 본편으로 유입된다. 더불어 주연배우와 오프닝으로 인해 <버스차장 히데코>와도
잇닿는다. 이같은 면모에도 불구하고 본편은 하나의 단절을 표제로 대두시킨다는 점에서 전작과 단절된다.
두 편의 전작에서 인물은 복귀와 무지로 종결되지만, 본편은 인물이 극 내 상황을 모두 판별한 후 자신의
좌표를 완전히 이동시킴으로서 전반/후반을 분리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루세 미키오의 2층이다.
그 곳은 음악-예술을 들을 수 있거나, 아래로부터 음악 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의 장소다. 인물 외에
잠시의 방문을 제외하고 그 장소에 정주할 수 없다는 것은 서사상의 단절과 캐릭터의 위치를 일치시킨다.
본편에서 줍는 행위를 하는 둘째 언니와 엄마가 후반부에 그나마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행위가 실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어느새 사라지거나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일종의 관계의 자격을 부여한다.
원 주거지내에서 남성들의 난투가 있은 이후 인물이 문틀에 기대고 있는 행위는 이사-단절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 단절이 전근대/근대 등의 세대론이기보다 결혼/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한 염증인 것은 중요하다.
오프닝에서 인물이 버스 내에서 응시하는 것은 노부부의 온기였음은 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반증일 것이다.
무력한 남성, 남성 자본가의 수탈 등이 전후라는 사회적 맥락의 투명성보다 동년에 제작된 감독의 전작들
<오쿠니와 코헤이>, <엄마>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나란히 걸음으로 본편이 종결됨이 더 소중함은 당연하다.
번개 이후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엔딩의 걸음에서 두 인물은 처음에는 앞뒤로 걷다가 차츰 하나가 된다.
또한, 오프닝의 버스 창문이라는 앞으로의 시간이 엔딩의 뒤에서 지켜봄이라는 걸음으로 처리됨과도 같다.
근데 섭자막으로 표시되어 있네요...
그럴 경우는 뭔가요?
첨이라 암 것도 몰겠네요^^;;
단 평 : 1층에서 들려오는 음악
어원과 고양이에 종속되자면, 본편은 전작 <밥>에 연결된다. 벼락에 의해 쌀이 익는다라는 뜻과 아내/처의
맥락이 고양이와 더불어 본편으로 유입된다. 더불어 주연배우와 오프닝으로 인해 <버스차장 히데코>와도
잇닿는다. 이같은 면모에도 불구하고 본편은 하나의 단절을 표제로 대두시킨다는 점에서 전작과 단절된다.
두 편의 전작에서 인물은 복귀와 무지로 종결되지만, 본편은 인물이 극 내 상황을 모두 판별한 후 자신의
좌표를 완전히 이동시킴으로서 전반/후반을 분리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루세 미키오의 2층이다.
그 곳은 음악-예술을 들을 수 있거나, 아래로부터 음악 소리를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의 장소다. 인물 외에
잠시의 방문을 제외하고 그 장소에 정주할 수 없다는 것은 서사상의 단절과 캐릭터의 위치를 일치시킨다.
본편에서 줍는 행위를 하는 둘째 언니와 엄마가 후반부에 그나마 방문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행위가 실상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어느새 사라지거나 버려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일종의 관계의 자격을 부여한다.
원 주거지내에서 남성들의 난투가 있은 이후 인물이 문틀에 기대고 있는 행위는 이사-단절을 지시한다.
하지만, 이 단절이 전근대/근대 등의 세대론이기보다 결혼/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한 염증인 것은 중요하다.
오프닝에서 인물이 버스 내에서 응시하는 것은 노부부의 온기였음은 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반증일 것이다.
무력한 남성, 남성 자본가의 수탈 등이 전후라는 사회적 맥락의 투명성보다 동년에 제작된 감독의 전작들
<오쿠니와 코헤이>, <엄마>에서 허락되지 않았던 나란히 걸음으로 본편이 종결됨이 더 소중함은 당연하다.
번개 이후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엔딩의 걸음에서 두 인물은 처음에는 앞뒤로 걷다가 차츰 하나가 된다.
또한, 오프닝의 버스 창문이라는 앞으로의 시간이 엔딩의 뒤에서 지켜봄이라는 걸음으로 처리됨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