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뮌(La Commune (Paris, 187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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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뮌(La Commune (Paris, 1871)),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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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CD2의 용어만 약간 수정했습니다


 


호적계→재정위원,보안계→안보위원,



생활계→식량공급위원,총무계→군사위원



치안담당→사법위원







꼬뮌은 정확히 '꼬뮌평의회'로 시의회다.꼬뮌,즉 자치제의 꼬뮌 의원은 구행정과,시행정,정부 기능까지 수행했다.파리꼬뮌은 의회인 동시에 집단적인 정부 형태였다


 


 354분의 영화가 끝나면 조금은 애틋한 남녀 이중창이 흘러나온다

샹송 버찌의 계절(Le Temps des cerises)이다


 


 "1871년 5월 28일 일요일 퐁텐-오-루아 거리의 구급요원이었던 용감한 시민 루이즈에게." 이 헌사를 받은 루이즈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그가 여자라는 것, 간호사였다는 것, 파리 노동자들의 마지막 바리케이드가 무너진 그 해 5월 28일 싸움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 정도가 루이즈에 관해 알려진 사실의 전부다. 그가 퐁텐-오-루아 거리에서 베르사유군(프랑스 정부군)에게 사살됐는지, 근처의 페르-라셰즈 묘지로 끌려가 즉결처분을 당했는지, 아니면 체포를 모면해 살아남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쓰여진 이 헌사를 통해서, 루이즈라는 평범한 이름은 파리 전역을 핏빛으로 물들인 1871년 5월의 뜨거운 상징이 되었다. 이 헌사를 쓴 이는 장-바티스트 클레망이라는 저널리스트였고, 그가 루이즈에게 바친 것은 <버찌의 계절>이라는 노래였다.





 클레망은 나폴레옹3세의 제2제정과 파리코뮌 이후의 제3공화국 시대를 사회주의자로 일관하며 살았다. 아마추어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지금부터 꼭 140년 전인 1866년 <버찌의 계절>이라는 시를 썼다. '로망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의 첫 두 연은 이렇다. "우리가 버찌의 계절을 노래하고/ 나이팅게일과 티티새가/ 즐겁게 지저귀며 잔치를 벌일 때/ 미인들의 머리는 열정으로 그득 차고/ 연인들의 가슴도 그러리라/ 우리가 버찌의 계절을 노래할 때/ 티티새의 휘파람도 더 아름다우리// 그러나 버찌의 계절은 너무나 짧아라/ 우리 둘이 함께 꿈꾸며/ 귀고리를 따는 그 계절/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랑의 버찌들이/ 핏방울로 이파리 위에 떨어지네/ 버찌의 계절은 너무나 짧아라/ 우리들이 산호빛 귀고리를 따는 계절은."





 둘째 연에서 핏방울과 산호를 버찌의 붉은 빛과 포개기는 하지만, 이 시는 그 바탕이 혁명의 노래라기보다 사랑의 노래다. 이 시를 쓴 이듬해, 클레망은 망명지 브뤼셀에서 테너 가수이자 작곡가 앙투안 르나르를 만났다. 두 사람은 이내 의기투합했고, 르나르는 다시 그 이듬해인 1868년 클레망의 로망스에 선율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근대 샹송의 수원지(水源池)이자 최고봉의 하나인 <버찌의 계절>이 태어났다. 그리고 세 해 뒤, 클레망은 파리의 5월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정부라 할 파리코뮌은 1871년 3월18일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에서 시작돼 그 해 5월28일 벨빌 구역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면서 막을 내렸다. 특히 베르사유의 정부군이 파리로 진입한 5월21일 이후 여드레 전투는 파리 거리를 버찌처럼 검붉은 피로 적셨다. 코뮌 기간과 그 직후 베르사유군이 학살한 파리 사람들은 가장 보수적인 통계에 따르더라도 2만 명에 이르고, 이 숫자는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라 무려 10만으로까지 늘어난다. 정부군은 코뮌이 무너진 뒤에도 대대적인 노동자 사냥에 나서서, 파리의 페인트공, 연관공, 기와공, 제화공의 반 이상을 살해했다. 파리 코뮌의 대의원이었던 클레망은 코뮌 마지막날인 5월28일 퐁텐-오-루아 거리에서 루이즈를 만난 듯하다. 코뮌이 무너진 뒤 클레망은 런던으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1885년 시집 <<노래들>>을 간행하며 거기 묶인 <버찌의 계절>을 루이즈에게 바쳤다.





 그 뒤 <버찌의 계절>은 사랑의 노래라기보다 혁명의 노래가 되었다. 아니, 사랑의 노래이자 혁명의 노래가 되었다. 파리 코뮌의 또 다른 생존자인 외젠 포티에가 쓴 혁명가요 <인터내셔널>과 함께, <버찌의 계절>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좌익 레지스탕스를 하나로 묶어 세운 연대의 노래이기도 했다. 티노 로시, 이브 몽탕, 쥘리에트 그레코, 나나 무스쿠리, 장 뤼미에르 등 백 명이 넘는 가수들이 제 앨범에 이 노래를 삽입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작고하고 이틀 뒤인 1996년 1월10일, 미국 소프라노 가수 바바라 헨드릭스는 파리 바스티유광장에서 <버찌의 계절>을 부르는 것으로 이 사회당 출신 대통령을 기렸다. 이 노래의  마지막 연은 이렇다. "그리워라 버찌의 계절/ 내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거기서 비롯되었고/ 행운의 여신 곁에서도/ 내 아픔이 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난 버찌의 계절을 사랑하리/ 내 가슴 속 추억과 함께." <시사저널> 고종석

 

Comments

1 달별
수고하셨습니다.
비오신다는 소식입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1 초가삼간
감사합니다
1 밀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