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배경을 생각한 번역

자막제작자포럼

문화적 배경을 생각한 번역

3 europaa 2 3669 0
번역하면서 가장 까다로운 점을 꼽는다면 역시 뭐니뭐니 해도 언어 자체의 특징을 활용해서 감성을 건드리는 경우겠지요.

영어로 운(rhyme, 영어에서는 주로 각운)을 맞춘 표현이나, 동음이의어/유사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 또는 중의적 표현 같은 경우 말입니다.

최근의 예로 "허트 로커"에서는 "grass"가 있었습니다. 영어로 "grass business"라고 한다면 "잔디 장사"일 수도 있고 "대마초(마리화나) 장사"일 수도 있지요. 미국땅에서라면 "대마초 장사" 쪽일 가능성이 조금 더 크겠지만, 배경이 사막 지역인 이라크이고 그 동네에 없는 것을 팔아보자는 제안이라면 "잔디 장사"의 가능성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이라크는 금욕적인 이슬람 문화권이라는 점을 더 생각하면 "대마초 장사"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 면에서 애당초 엘드리지 상병이 꺼낸 "grass"라는 말은 "잔디"일 수도 있고 "대마초"일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중의적인 농담인데, 샌본 병장은 그 농담을 캐치하고 웃으면서도 이야기를 "잔디" 쪽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우리 말로 풀면 잔디는 잔디고 대마초는 대마초니까, 같은 낱말에 담긴 두 가지 뜻에서 나오는 잔재미 자체를 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잔디 = 떼"라는 점에 착안하여 원래의 영어 우스개 대신 (우리말 버전의) 다른 말장난을 끼워 넣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grass business/we'll get rich" -> "잔디 장사/떼돈 벌다") 원래의 시시한 농담 따먹기 분위기가 얼마나 살았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밖에 또 까다로운 점이라면, 문화적 배경이 개입되어 있는 표현을 풀이해야 할 때입니다.

"인 디 에어" 에서는 "마이스페이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원래는 "마이스페이스에 자기 공간이 있다고 회사를 멋대로 휘저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인데, 그대로 풀어버리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하겠지요. 그래서 "마이스페이스" 대신 "싸이월드"로 치환했습니다. "싸이에 자기 홈피 있다고 회사를 온통 갈아 엎을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잖나?" 이렇게 바꿨어요. 비슷한 경우라도 가령 "마이스페이스"가 아니라 "트위터"였다면 딱히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쓸 수 있었겠지만 말이지요.

다시 "허트 로커"에서는 "be all (that) you can be"라는 노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직역하면 "당신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어라"이지만, 이 노래는 사실 왕년의 AFKN에서도 자주 나오곤 하던 미군 모병 캠페인 주제가(?)입니다. 모병제 군대에 입대한 미군들끼리야 "that song, be all you can be"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척 알아듣겠지만, 그리고 미국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노래이니 알아듣겠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지요. 그래서 "모병 광고 있잖아요, 뭐든 될 수 있다 어쩌구"라고 풀었습니다. 원래 대사에는 "모병 광고"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제가 끼워 넣은 거죠. 저야 그게 좋겠다 싶어 그렇게 했지만, 과연 그게 잘 한 건지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음... 자잘한 것 몇 가지 더 늘어놓고 맺지요.

종교에 엮인 집단 자살 사건이라는 면에서 우리 나라의 오대양 사건과 비슷한 데가 있는 "천국의 문(Heaven's Gate)" 사건 - "인 디 에어"에 간접적으로 잠깐 나옵니다.

"Mr. Be All You Can Be" - 맥락을 생각해보면 "모병 광고에 나옴직한 모범 군인"이죠. 저는 우리말(?)로 "FM 군인 아저씨"라고 풀었는데, 우리나라 군대에서 통하는 용어를 아는 분이라면 저 FM을 설마 FM 라디오의 FM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Field Manual", 즉 "야전 교범" 입니다. 2차적으로 통용되는 뜻은 "모범", "표준" 정도?)

허츠(Hertz), 마에스트로(Maestro), 콜로니얼(Colonial)은 차 이름이 아니라 렌터카 회사 이름이지요. 미국에서 이름난 회사들 중에는 다국적 기업이 많아서 우리 나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예가 흔하지만, 미국인들끼리야 익숙해도 미국 밖에서는 접할 수 없는 회사 또한 많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렌터카 회사들 중에는 허츠 정도가 그나마 다국적(?) 기업이지요. (사실 마에스트로나 콜로니얼은 어쩌면 실재하는 회사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지어낸 이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만 이름난 상호로 얼른 떠오르는 게 "RadioShack"입니다. 미국 내에서는 온갖 전자부품, (전기/전자 제품 관련) 공구류를 파는 전국(?) 체인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데, 그래서 "Hey Mr. RadioShack!" 같은 대사 - 제 기억으로는 아마 "Enemy of the State"에 나왔지 싶습니다 - 가 나오면 글쎄... 맥락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봐 순돌 아빠!" 정도로 풀 수 밖에 없겠지요. "래디오섁"이라는 말 자체는 허트 로커에도 한 번 나왔습니다.

그만 맺겠습니다.



추신.

아... 이러고 끝낼 이야기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원래 꺼내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른 분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으셨을 텐데, 어떻게들 대처하고 계신가요?"랍니다.
이를테면 "내 경우에는 이런 표현이 풀이하기 까다로웠던 적이 있는데 결국 이렇게 처리했다." 뭐 그런... :)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2 Comments
3 담군  
재밌는 글이네요, 전 아직 실력도 안되지만
아무래도 자막이라는 게 '짧고 굵게' 만들어야
읽는 사람이 프레임 시간안에 놓치지 않고 편안히 보게 되잖아요.

그런 굴레로 부터 자유롭지도 않고, 가끔 문화적인 부분을 우리식으로 만들면
그 영화 속에 있는 고유의 언어를 느끼고자 하는 분들께선 거부할 수도 있어서
참 어렵고 어렵더군요, 가끔 말수를 줄이기 위해 생략하고 그러다 보면
아... 이 영화의 잔 재미를 내가 없에는가 고민도 되고,,, 제가 영어를 잘 못해서
그런지 어려운 말이 나오면 난감하기도 하고.. 극장에 가서 극장자막은 어떨까 보면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구가 싶을 때도 있고 어.. 저건 아닌데 싶을 때도 있더군요.

전 가끔 내용 전달을 위해 내용을 바꿔 버릴 때도 있어요
그리고 가장 어려운게 역시 중의적인 표현의 말장난이 아닐까 하네요.

우리야 그나마 주석을 달아서 해명하면 되지만 극장은 또 그게 안되니
주석 없이 푸는 방법을 고안하다보며 머리는 깨지죠... 한문장 가지고 고민하다보면
자막 만드는건.. 세월아 가지마라 하고 있는 거고... 또 그걸 알아주는 사람도 없다는게 슬프죠.
3 europaa  
이 무슨 당치 않은 겸양의 말씀을...

댓글 달아주시니 쓸쓸하지 않고 좋네요. 고맙습니다. :)

실은 저도... 뭐 어쩌다 한 번씩이기는 해도, 자막 만들다 보면 '아무래도 좀 자폐적인 취미같아'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풀어가면서 울고 웃고, 때로는 머리털 쥐어 뜯기도 해가며 만들어낸 뒤에 드는 그 기분, "내 덕분에(?)" 다른 양반들도 이 영화를 좀 더 원래 의미에 가깝게 보실 수 있겠거니 하는 뿌듯함 - 특히 DVD에 들어 있는 '상품화한 자막'이 미흡해서 다시 만든 경우 - 이랄까, 그런 재미에 이따금씩 다시 하게 됩니다.

제 경우에는 번역 결과가 길어서 미처 읽기 전에 넘어가는 경우가 생겨도 일단은 의미 전달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우선 그래 놓고 다시 다듬으면서 최대한 줄이고, 싱크도 바꿔보고, 어순도 조정해보고 하면서 너무 길다는 느낌을 없애려고 하죠. 그렇지만 어떻게 해봐도 원 뜻을 희생하지 않고는 안 되겠을 때는, 좀 길다 싶어도 그냥 두는 편입니다. 상품 자막이 아니라서 부릴 수 있는 만용인 셈이에요. :)

음... 저는 그런 골몰을 딱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음대로 (심지어 대개는 엉터리로) 뜯어 고치고 난도질하거나... 만든 사람 싸인 몇 줄마저 날려버리고 자기가 만든 척 하는 사람만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간혹 그마저도 지나친 바람인가 싶을 때면 슬프... 아니, 화가 납니다 - 아직 젊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