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 영화 2편 - 키갈리에서의 일요일, 해리슨의 꽃

자막제작자포럼

내전 영화 2편 - 키갈리에서의 일요일, 해리슨의 꽃

예전부터 무척이나 한글 자막이 나오길 기다리던 영화였는데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결국 제가 작업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1. 해리슨의 꽃 (Harrison's Flowers, 2000)
2. 키갈리에서의 일요일 (A Sunday In Kigali, Un Dimanche A Kigali, 2006)


이 두 영화는 최근에 일어난 내전을 다룬 영화입니다.
하나는 유럽의 유고슬라비아 내전이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의 르완다 내전입니다.

모두들 각종 매체와 영화를 통해서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살짝 퍼왔습니다.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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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유고슬라비아 내전



내전은 1991년 6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어,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 코소보 등지로 싸움터를 옮겨가면서 벌어졌다. 그 사이 주요 민족의 분포에 따라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이루어졌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은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신유고 연방·마케도니아로 분리 독립되어, 민족간 대립을 격화시켰다.


〈슬로베니아 내전〉 인구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인으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이들의 독립을 사실상 묵인하고 철수하였다.


〈크로아티아 내전〉 크로아티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자 1992년 4월 1만 4000명 규모의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어 완충 역할을 하였으나 유혈 충돌이 계속되었다. 세르비아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인의 극단적 민족단체인 우시티시가 세르비아인 50여 만 명을 학살하였기 때문에 크로아티아가 독립할 경우 이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남을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시 학대를 받을까 우려하여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막은 것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 인구 450만 명의 보스니아는 이슬람계 43%, 세르비아계 32%, 크로아티아계 17% 등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가 독립을 강행하자 세르비아계는 민족별 분리를 주장하여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내전은 다른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양상을 띠어 방화·살상·강간이 자행되어 1995년까지 2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소보 내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코소보주(州)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여 코소보 해방군을 조직하였고, 세르비아 보안군은 이들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알바니아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종청소'를 경고하여 온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유고슬라비아가 이를 묵살하자 1999년 3월 24일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공습을 단행하여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인명 피해는 아직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알바니아계 난민은 40∼50만에 이르러 인근 마케도니아 등지로 피난하였다.


코소보 지역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1995년 12월 파리에서 세르비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의 세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조인함으로써 표면상 종식되었으나 크고 작은 30여 민족과 여러 종교가 혼재한 이 지역은 여전히 그 분쟁의 씨를 안고 있다.




▶ II. 르완다 내전



1990년부터 99년까지 이어진 반(反)정부게릴라 조직 르완다애국전선(FPR)과 정부군 사이에 벌어졌던 내전. 르완다의 민족구성은 선주민(先住民)인 후투족이 90%, 15세기에 남하해 온 투치족이 9%인데, 식민지시대도 소수자인 투치족의 봉건적 지배구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 2 차세계대전 뒤 후투족의 세력이 강해지고, 62년 7월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후투족이 주도하는 정권이 이어졌다. 더구나 독립 이전인 59년 이후 투치족과 후투족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73년 7월에는 후투족 출신인 하비아리마나 국방장관이 무혈쿠데타로 카이반다 초대대통령을 축출하고 집권했다. 90년 9월 후투족을 적대시하는 투치족 반군인 르완다애국전선(FPR;우간다로 탈출한 투치족 난민이 주체)이 우간다에서 넘어와 북부지역을 점령했다.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은 반군과 협상, 전투를 벌인 끝에 정치적 양보조치로 91년 6월 복수정당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 신헌법안을 재가하여, 92년 4월 여야연립정부가 출범하였고, 93년 8월에는 FPR와 정부측과의 포괄평화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94년 4월 르완다와 부룬디 양국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었고, 후투족 출신인 두 정상의 사망을 계기로 후투족이 투치족과 후투족 온건파 50∼100만여명을 학살함으로써 FPR와 정부군이 전면 내전을 돌입했다. 7월에 FPR가 키갈리를 점령, 권력을 장악하고 지도자 P. 비지뭉구를 대통령으로 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 내전과 보복 할살을 두려워한 수많은 후투족 주민들이 이 과정에서 옛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와 탄자니아 등지로 피난했다. 94년 12월에는 FPR를 중심으로 한 잠정의회가 발족되어, 임기가 만료되는 5년 후에 대통령과 의회선거를 실시키로 결정했다. 95년 8월 비지뭉구 대통령은 F. 트라기와뭉구 총리를 경질하고 후임에 후투족 온건파인 P.C. 뤼기에마를 기용하였다. 그런데, 96년 10월 옛 자이르 동부지역의 난민수용소에 있던 후투족 과격파들이 자이르군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는 투치족을 공격하였고, 이에 투치족이 르완다 정부군의 지원 아래 난민수용소를 공격하고, 이 지역 중심도시 고마를 무력을 점령했다. 한편, 내전 당시 주변국으로 피난했던 200여만 명의 난민들 중 130여만 명이 96년에서 97년 사이에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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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화 모두 아직 국내 미개봉작입니다.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먼저 '키갈리....' (참고로 키갈리는 르완다의 수도 이름입니다)는
캐나다의 백인 남자와 르완다의 소수족인 투치족 여인과의 멜로 라인이 주축을 이룹니다.
남자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방송인이고 여자는 호텔 여급입니다.
이쯤 되면 대충 통속적인 멜로로 흐르겠거니 싶겠지만
감독은 이런 우려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시나리오를 탄탄하게 짜 놨습니다.
전체적인 플롯은 남자가 내전 중에 홀로 두고 떠나온 여자를 다시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호텔 르완다'와는 사뭇 다르게 억지스럽지 않고 감동을 강요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객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오히려 그게 더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슬픈 사랑이 아련하게 가슴을 파고 듭니다...


다음은 '해리슨.....'은 유고슬라비에서 사망한 걸로 처리된 사진작가인 남편을 찾으러
아내가 내전이 한창인 유고슬라비아로 떠나는 내용입니다.
전투 장면은 여느 전쟁 영화 못지않게 참혹하고 실감납니다.

닮은 듯하면서도 약간은 다른 두 영화를 비교해서 보시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감상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어느 걸 먼저 시작하고 어 느게 먼저 완성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틈 나는 대로 작업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냥 잊어버린 듯 기다리시면 언젠가는 나오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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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24 오철용  
  <FONT color=#ff0000>" Two Thumb up !! "<BR>화 이 팅 !</FONT>
1 달별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