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ho must die,Celui qui doit mourir/죽어야 하는 남자, 1957 [스포있음]

영화감상평

He who must die,Celui qui doit mourir/죽어야 하는 남자, 1957 [스포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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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ho must die,Celui qui doit mourir/죽어야 하는 남자, 1957 ***** ****

평점 , 2.35:1 screen/흑백/2.0 모노/122, 이태리/프랑스,

감독 Jules Dassin, 출연 Melina Mercouri, Katerina / Mary Magdalene, Jean Servais ... Priest Fotis

Carl Möhner ... Lukas, Grégoire Aslan ...Agha, Gert Fröbe ... Patriarcheas (as Gert Froebe)

수상 "1958 BAFTA Awards 음악상 후보, 1957' Cannes Film Festival 황금종려상 후보,특별상 수상"


<"희랍인 조르바>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불멸의 걸작이 <페르라>의 줄스 다신을 만나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그리스 크레타(Creta)섬의 수도인 메갈로카스트로(현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났다. 카잔차키스가 태어난 당시 크레타는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터키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더랬다. 사춘기 때부터 이런 집안의 영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고 터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9년 크레타에서 터키인 관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터키인들에 의해 기독교인 학살이 시작되자 그의 가족은 키클라데스 제도 낙소스(Náxos) 섬으로 피신하였다. 낙소스 섬에서 프랑스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프랑스어를 배운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그리스 정교를 믿었기 때문에 프랑스 가톨릭의 영향을 반대하며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였다.


1902년 아테네로 건너가 아테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졸업하자 그리스 섬 곳곳을 여행한다. 특히 파리에서 그는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카잔차키스에게 큰 사상적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신은 죽었다고 주장한 니체의 표현대로 이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힘과 정신으로 질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불교에 심취해서 부처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얻기위해 노력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1917년에는 친구 알렉시스 조르바와 갈탄 광산을 찾기 위해 크레타 해안에서 머물렀다.


그들의 광산사업은 망하고 말았지만, 조르바와 추억을 <희랍인 조르바>라는 소설 속에 녹여내었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유쾌함과 순수함을 존경했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훗날 평가했다.


하지만 카잔차키스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작품은 역시 오늘 소개하는 바로 그가 1955년에 발표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 O Khristós Xanastavrónetai>이다.


이 소설은 <페드라>를 만든 줄스 다신 감독에 의해 <죽어야 하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카잔차키스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에서 당시 유럽의 큰 화두였던 전쟁 난민 문제를

유럽의 철학·문예·사회 사조 등을 버무리면서 그리스의 본원적(本源的)인 신앙심과 비교하면서 행위 없는 신앙의 위선을 까발리는 위대한 문학으로 완성시켰다.

이 소설은 카잔차키스를 세계적인 대 문호로 각인시킨다.


알다시피 그리스와 터키는 영원한 애증의 관계다. 그리스 정교 종주국으로서 로마와 적당하하게 타협하면서 그리스 반도를 지배하던 그리스가 동로마 제국과 함께 1453년 오토만 제국에 의해 멸망된 이후 약 400년간을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던 비운의 섬이었다.


그러했던 그리스는 1912년 결성된 발칸 4국 동맹 협약으로 겨우 크레타 섬을 터키로부터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00년대초 여전히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그리스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크레타 섬은 그리스 정교회와 터키의 이슬람교가 극렬하게 충돌하는 에게해의 화약고와 같은 지역이었다.


크레타 섬은 역사 대대로 매년 마을 사람 전체가 <예수 수난극>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리는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집단촌이었다.


그해도 어김없이 그들은 터키 정부에게 허가를 맡은 후 <예수 수난극>을 준비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터키 정부를 대신해서 주둔한 총독을 <아기(Agie) 총독>이라고 부르는데 정말이지 한 방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는 그리스인들을 대하는 모든 태도가 징글맞고 노련하기 그지없다.


이 마을의 수장은 그리스 정교회의 그레고리스 신부다. 당연히 <예수 수난극>의 총감독 역시 그레고리스 신부다.


극에 출연할 12명의 제자들로는 마을의 이러저러한 청년들이 마을 의회에서 선출된다.


올해도 막달라 마리아 역으로는 동네에서 온갖 남자들을 후리고 다니는 창녀인 카탈레나(Melina Mercouri) 가 선발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올해의 예수 역으로는 동네에서 가장 수줍음이 많은 마놀리오스라는 남자가 맡게 된다. 마놀리오스는 자신은 말더듬이에다가 수줍음을 심하게 타기 때문에 예수 역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항변하지만 그레고리스 신부는 단호하게 예수님 역으로 마놀리오스를 지명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 수난극>의 연습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이 마을에 험악한 사건이 덮친다.


터키로부터 마을이 불타고 함락당한 이웃의 피난민들 약 수백명이 크레타 섬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게다가 이들 중에는 이미 콜레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크레타 주민들은 황급하게 이들을 마을로부터 몰아낸다.


피난민들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크레타 사람들을 저주하며 반대편 사카리나 산으로 올라간다.


이때부터 크레타 사람들과 사카리나 피난민들 사이에 영화 내내 엄청난 반목과 대립이 팽팽하게 줄을 당긴다.

콜레라로 죽어가는 사카리나 산 위의 난민들... 그들을 대상으로 몰래 빵 한 조각을 팔고, 대신 그들의 손가락에 끼어있는 금반지를 받아내는 극악한 크레타의 장사꾼이 있는가 하면 반면 죽어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이 용감하게 나선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예수 수난극>에서 예수 역을 연기하는 마놀리오스다. 마놀리오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토지 위에 난민들을 위한 정착촌을 짓겠다고 한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이런 마놀리오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단하려 하고 동시에 터키 군들은 이 난민들을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마놀리오스는 터키군과 자신을 반대하는 마을 사람 모두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런 마놀리오스를 돕는 유일한 사람은 마을의 창녀 카탈레나 뿐이다.


마지막에는 결국 마놀리오스가 체포되어 죽게된다. 하지만 마을은 모두 봉기하여 터키군과 대척을 한다. 신부는 아이에게 알아듣기 좋게 얘기를 한다. 지구에 악의 무리가 쳐들어오면 천사가 지키고, 무너지면 천사 둘, 또 무너지면 천사 넷이 지킬 것이라고...


엄청나게 철학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비유적인 한 거장의 마스터피스다. 왜 세월이 지나도 수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우리 인간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카잔차키스의 이 작품을 가장 먼저 순위에 올리는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영화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요한계시록 31~)"

온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서 예수의 수난극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면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는 크레타 사람들의 행위를 통한 구원에 카잔차키스는 행위없는 신앙은 죽은 믿음이라고 못 박으며 기독교의 이중적 민낯을 통렬하게 까발리는 영화.


카잔차키스는 거듭 말한다.


너희 행위에 중독된 기독교인들이여... 그대들은 21세기, 세기말에 예수가 다시 이 땅에 온다 해도 결국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바리세인적인 기질을 갖고 있노라고.

그래서 한번의 예배를 드리기 전에 야고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야고보서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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