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의 자기계발(서)와 중얼거림

영화감상평

킬러의 자기계발(서)와 중얼거림 <The Killer,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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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



표면으로 드러난 서사는, 킬러가 프랑스로 가 타겟의 암살에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제거될 위기에 처하자, 클라이언트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서사를 거꾸로 읽으면, 사태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킬러의 암살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벽하게 과잉의 암살을 수행한다.

인물들은 산 자-죽은 자로 크게 대별된다. 이들 모두는 고용-피고용 관계이다. 킬러만이 그 중간에 있을 뿐이다. 전자인 산 자는,

클라이막스에서의 클라이언트와 타겟인 프랑스 자본(혹은 정치가)인데, 둘은 고용자들이다. 후자인 죽은 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더라도 모두 누군가에게

고용된 자들이다. 콜걸, 택시운전수, 변호사와 그 비서, 짐승과 여자 킬러. 자본에 의해 고용되는 성산업, 운송업, 법률업, 킬링업을 서비스하는 노동자들인 것이다.

킬러 역시 클라이언트에 의해 고용된 서비스업 노동자이다.

이 관계는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클라이언트는 그 구조의 최상층에, 노동자는 최하층에 존재한다.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사이, 킬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킬러가 클라이언트를 죽이지 않고 (그는 최고층 빌딩의 최상층에서 티비화면의 주식중계 뉴스를 통해 재현되는 미 국제금유자본가로 표상된다.

따라서 그는 미국을 지배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킬러의 사회적 위치, 즉 중간착취자로서 피착취자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클라이언트의 암살 명령에 대한 실패로서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킬러를 제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암살 명령에 대한 실패를 성공함으로써 다른 가짜 증거를 제시하고 킬러가 그 증거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킬러는 도미니카공화국,

뉴올리언스, 플로리다, 뉴욕, 전 미국을 옮겨다니며 킬링 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그는 뇌까린다 "내겐 안전하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유일한 인생의 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여타의 6070년대 보통의 암살, 음모, 정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 대한 어떤 일말의 의구심이나 도덕적 회의가 없다. 균열은 커녕,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봉사한다. 정치성이 제거된 채,

자기계발서의 어떤 초월적 절제와 극단적인 성공주의를 겸비한, 동시에 쿨함과 건강까지 알뜰히도 챙기는 21세기형 킬러인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킬러는

충성의 댓가로 풍족한 돈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맞이하며 새로운 미래를 보장 받겠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막스에서,

킬러가 클라이언트를 살려준게 아니라, 클라이언트가 킬러를 '일단' 살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미니카 공화국은 미국의 앞바다이다.

영화는 핀처의 영화라고 또 상찬받겠지만, 지겨운 스타일의 우려먹기와 변명과 자기합리화만 있을뿐인 미국식 실용주의를 위한 졸작 오브 졸작이다 *LMDb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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