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ldren of Men (2006)

영화감상평

Children of Men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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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최근에 새로 추가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넷 플릭스에

Children of Men (2006)

이 있다. <그래비티>와 <로마>를 감독했던 알폰소 쿠아론이 그 둘보다 먼저 감독한 작품이다. 흥행에 실패했지만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중 수작으로 평가받게 되었고 역동적인 롱 테이크 장면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내 자신은 몇몇 장면이 인상적이었을뿐 입이 딱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래비티>와 <로마>보다는 좋았다. 국역되어 있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의 1장에 이 영화에 대한 정곡을 찌르는 코멘트가 있다. 걸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사에는 남을 영화이니 넷 플릭스 가입한 분들은 꼭들 감상해 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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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의 코멘트 


알폰소 쿠아론의 2006년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주요 장면에서 클라이브 오언이 연기한 테오는 배터시 발전소에 있는 한 친구를 방문한다. 발전소는 이제 공공건물과 사적인 소장품 공간을 겸해 사용되고 있다. 그 자체로 재단장된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이 건물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핑크 플로이드의 「애니멀스」 앨범 표지에 등장하는 돼지 풍선 등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 이것이 대규모의 불임을 초래한 어떤 재앙 (한 세대 동안 아이가 전혀 태어나지 않았다) 을 피해 틀어박힌 상류층의 삶을 일별할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테오는 질문을 던진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 이 모든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래 세대는 더 이상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답은 니힐리즘적 쾌락주의다. “그것까진 생각하지 않으려 해.”

「칠드런 오브 맨」의 디스토피아가 독특한 까닭은 그것이 후기 자본주의 특유의 디스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적 디스토피아가 판에 박힌 듯 내놓는 그 익숙한 전체주의 시나리오 (가령 제임스 맥티그 감독의 2005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라) 와는 다르다. 「칠드런 오브 맨」이 기반하고 있는 필리스 도러시 제임스의 소설에서는 민주주의가 유보되어 있으며 통치자를 자처하는 워든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현명하게도 이 모든 것을 사소하게 취급한다. 알다시피 어디에나 자리를 잡고 있는 권위주의적 조치들은 명목상 민주주의로 남아 있는 정치 구조에서도 시행될 수 있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이 그처럼 전개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령 위기가 일상화됨에 따라 비상사태에 대처하고자 도입된 조치들을 폐지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 전쟁은 언제 끝날 것인가?).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am 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한때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나 소설은 이런 대안적 상상 행위의 연습이었고, 그런 작품이 묘사한 재앙들은 다른 삶의 방식이 출현할 수 있는 서사적 구실로 작용했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영화가 투영하는 세계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우리 세계를 외삽했거나 우리 세계가 악화된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 세계에서도 극단적 권위주의와 자본은 결코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 포로수용소와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공적 공간은 방기된 채로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와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이 차지하고 있다(폐교에서 사슴 한 마리가 뛰어다니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탁월한 자본주의 리얼리스트인 신자유주의자들은 공적 공간의 파괴를 경축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칠드런 오브 맨」에서 국가는 전혀 위축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군사 및 치안이라는 그 핵심 기능을 노출하고 있다(“공식적으로 알려진” 희망이라고 말한 이유는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국가를 맹비난하는 동안에도 은밀하게 국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2008년의 금융 위기 동안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초대로 국가가 은행 체계를 떠받치기 위해 적극 개입했을 때 극적으로 분명해졌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파멸은 장차 일어날 일도 이미 발생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파멸은 지금 겪고 있는 일이다. 파멸이 발생한 정확한 순간은 없다. 세계는 한 번의 대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빛을 잃고 흐트러지면서 점차 허물어진다. 무엇이 파멸을 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멸의 원인은 먼 과거에, 어떤 악한 존재의 변덕(일종의 부정적인 기적, 혹은 참회로는 풀 수 없는 저주 같은)처럼 보일 만큼 현재와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과거에 놓여 있다. 애초에 저주의 시작을 예상할 수 없었듯 예상할 수 없는 개입만이 그런 파멸을 완화할 수 있다. 행위는 소용없다. 무의미한 희망만이 의미를 만든다. 무력한 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곳인 미신과 종교가 급증한다.

그런데 무엇이 파멸인 걸까? 불임이라는 주제를 은유로, 다른 종류의 불안이 전치된 것으로 읽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나는 이런 불안을 문화의 견지에서 읽어야 한다고, 나아가 이 영화가 다음의 물음을 제기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칠드런 오브 맨」은 종말이 이미 왔다는 의심, 아마도 미래에는 반복과 재조합만이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단절도 없고 도래할 ‘새로움의 충격’도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런 불안은 결과적으로 양극 사이에서 동요하는 경향이 있다. 미래를 향한 길에 틀림없이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약한 메시아주의적’ 희망이 그 어떤 새로운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침울한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미래에 발생할 중요한 사건에서 마지막으로 있었던 중요한 사건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그 일은 얼마나 오래전에 일어났으며 얼마나 대단했는가?

「칠드런 오브 맨」의 배경에는 T. S. 엘리엇이 어렴풋이 자리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영화는 불모성[불임]sterility이라는 주제를 『황무지』로부터 물려받고 있다. 영화가 끝난 뒤 뜨는 경구인 ‘샨티 샨티 샨티’는 우파니샤드의 평화보다는 엘리엇의 작품과 더 많은 연관이 있다.2 아마도 「칠드런 오브 맨」에서 또 다른 엘리엇, 즉 「전통과 개인의 재능」을 쓴 엘리엇의 관심사가 암호화되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엘리엇은 해럴드 블룸을 선취하면서 정전적인 것과 새로운 것 사이의 상호 관계를 묘사했다. 새로운 것은 이미 확립되어 있는 것에 응답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한다. 동시에 확립된 것은 새로운 것에 답하며 자신을 재형성해야 한다. 엘리엇의 주장은 미래를 고갈시키게 되면 우리에게는 과거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통이 더 이상 논쟁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때 그 전통은 아무 쓸모도 없어진다. 그저 보존되어 있기만 한 문화는 결코 문화가 아니다. 영화 속 「게르니카」의 운명이 그 본보기인데, 한때 파시스트의 잔혹성에 맞서는 고뇌와 분노의 울부짖음이었던 이 그림은 이제 벽에 걸린 장식품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게르니카」가 ‘우상’의 지위를 얻는 것은 그림을 보관하고 있는 배터시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가능한 기능과 맥락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적 대상도 그것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그 힘을 유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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