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 벨라 타르

영화감상평

<토리노의 말> - 2011, 벨라 타르

헝가리의 예술영화감독 벨라 타르는 2011년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 <토리노의 말>을 발표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나이 겨우 57세에 불과했다. 그의 갑작스럽고 이른 은퇴 선언은 아마도 ‘토리노의 말’에 표현된 깊은 심연의 절망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벨라 타르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러닝타임이 무려 7시간 20분에 이르는 1994년 영화 <사탄탱고>와 2000년에 발표한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와 더불어 <토리노의 말>이 될 것이다. 물론 이들 영화들은 비평가들에 의해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종종 영화 역사상 최고의 100대 영화 목록에 들기도 한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년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알려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산책을 하던 중 주인이 세게 채찍질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완고한 말을 발견했다. 니체는 주인의 채찍질을 막으며 비참한 그 말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그 후 그는 심각한 정신 쇠약에 빠졌으며 “엄마, 나는 바보였어.”라고 중얼거렸으며 죽을 때까지 거의 침묵을 지켰다. 말썽을 부리던 말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토리노의 말>은 그 늙은 말의 뒷 이야기를 추적한다고 볼 수 있다.


벨라 타르의 다른 영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어느 특정한 역사적 시간과 공간으로 일치시키거나, 어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영화는 늘 인간의 삶의 조건, 또는 삶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표현하는 주제는 매우 중층적이며, 그렇기에 관객의 다양한 경험, 시각, 해석에 대해서 열려 있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시간의 종말에 관한 것이다. 끊임없이 거친 바람이 불어대는 광야를 배경으로 한 느리고 엄숙한 흑백 영화인 <토리노 말>은 기술적으로도 최고의 할리우드 영화 이상으로 정교하다. 이는 생명의 파국에 대한 종교적인 의식이며 그 레퀴엠이다. 벨라 타르는 죽음이 아니라 ‘멈춤’으로 그 파국을 숭고함으로 격상시킨다. 이 종말의 숭고함에 대해 벨라 타르는 비타협적인 헌신을 바쳤다.


말과 그의 주인, 그리고 주인의 딸의 6일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종의 창세기 이야기를 거꾸로 한 것이다. 세계의 종말론적 파괴가 아니라 단계적 소멸을 의미한다. 바람은 계속해서 울부짖고,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존재가 멈춘 것처럼 보인다.


2시간 26분 동안 30개의 길고 긴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인간 존재의 무거움'에 대한 냉철한 관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흙바닥과 장작 난로가 있는 외딴집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우주조차도 보존되지 못한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암울하고 절망적이 된다. 말은 이제 더 이상 먹기를 거부한다. 잠시 농장에 들른 집시들이 농부의 딸에게 준 책은 그들의 작은 세계에 또 다른 불길한 어조를 더한다. 집시들이 떠난 후 집 근처 우물이 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나지만 아마도 떠날 곳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듯 이내 돌아온다. 그리고 서서히 ‘멈춤’으로 생존을 마감한다.


이처럼 끝 모를 절망의 심연을 담은 영화 <토리노의 말>을 발표한 후 은퇴를 선언한 벨라 타르는 지적 사유의 절대적 절망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벨라 타르 자신은 영화 속에서 표현된 더 이상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마지막 남은 식량인 감자가 될 수도 있고, 바싹 말라버린 우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우리에게 절망과 삶의 조건에 대한 풍성하고 넉넉한 철학적 밑천을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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