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랍스터(The Lobster) (2015) 리뷰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作 / 스포 有 / 2022년 10월 4일 관람

영화감상평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 리뷰 /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作 / 스포 有 / 2022년 10월 4일 관람

1 코끼리나방 2 388 0

안녕하세요, 씨네스트에 오늘 가입한 코끼리나방입니다.

동료 시네필 분들과 감상을 나누고 싶어 작년에 <더 랍스터>를 관람한 직후에 써내려갔던 리뷰를 조금 첨삭해 게시합니다.

다들 좋은 월요일 되세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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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리뷰

만점짜리 사랑이 아니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경계를 경계하다

내가 이 호텔에 대해 가장 먼저 받은 인상은 대부분의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경계를 경계하는 태도’였다. 커플이 되든 동물이 되든 양자택일만 가능한 이 호텔의 원칙은 호텔의 기타 운영 방향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투숙객은 리셉션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등록할 때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로 등록할 순 있지만 양성애자로 등록할 순 없고, 호텔은 투숙객에게 44 사이즈 신발도 제공하고 45 사이즈 신발도 제공하지만 44 1/2 사이즈짜리 신발은 제공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이분법적 논리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수반된다.

호텔 측은 어떻게든 투숙객들을 커플로 만들어 내보내기 위해 호텔은 갖가지 조치와 벌칙을 사용한다. 하나보다 둘이 더 낫다는 점을 일깨워주기 위해 오른손을 수갑으로 결박시킨다든가, 바지에 자물쇠를 채운다든가, 자위를 한 사실이 발각된 사람의 손을 토스터기에 넣어 화상을 입힌다든가 말이다.

보고 있으면 마치 사이비 심리치료요법/교정요법의 일종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아이들의 성정을 계급별로 가꾸기 위해 소음 등으로 행동을 교정하는 장면도 떠올랐다.

 

그런데 데이빗은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도 않고, 신발 사이즈는 44 1/2 사이즈다.

애초에 데이빗이 호텔에 투숙하게 된 것도 그가 '눈이 잘 보이지도 않고 아예 안 보이지도 않는' 근시였기 때문이다. (데이빗의 아내가 데이빗이 근시인이라 이혼하길 원했다는 점은 '경계를 경계하는' 호텔의 분위기가 이분법적인 도시 문화의 반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데이빗이 친교를 맺는 사람들도 경계에 있다. 로버트는 혀짧음증이 있고 존은 다리를 전다 - 장애가 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성급하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핸디캡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분법을 강요하는 호텔에서 경계인인 데이빗은 짝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데이빗과 비정한 여자 사이의 로맨스(?)를 일례로 들 수 있겠다.

데이빗은 무려 192명의 탈주자를 사냥한 ‘비정한 여자’의 머리 스타일과 말투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도 그녀만큼 비정한 척을 한다. 1층(우리나라로는 2층)에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여자가 괴성을 지르는 데에도 자긴 조용하게 쉬고 싶다며 불평하고, 비정한 여자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올리브가 목에 걸려 질식하는 척할 때도 아무 관심도 주지 않는다. 여자는 그게 마음에 들었고 둘은 커플이 되었다. 데이빗은 그녀와 커플이 된 후에도 존, 그의 짝 그리고 둘의 아이를 만났을 때에 아이의 정강이를 차면서 꾸준히 연기한다.

하지만 비정한 여자가 자기 형(개로 변한 모습이다)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결국 화장실에서 숨죽여 눈물 흘리다 그녀에게 그 모습을 들킨다. 이때 여자는 그가 자신을 속였다고, 호텔 측에 고발해서 아무도 되고 싶지 않은 동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기 짝이 남의 고통에도, 친구의 아이의 고통에도, 자기 자신의 (가장한) 고통에도 비정했지만 자기 형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것 때문에 속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비정하려면 누구에게나 비정해야 한다는 그녀의 단호함은 이분법적인 도시의 문화가 드러나는 또다른 순간이다.

 

이런 소위 ‘어중간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면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비정한 여자처럼 사냥을 잘 해서 주어진 투숙일수를 늘리든가,

코피가 자주 나는 여자와 유대감을 쌓고 커플이 되기 위해 남몰래 벽이나 문에 코를 박아 코피를 내는 존처럼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든가,

정 못하겠으면 데이빗처럼 숲으로 탈출하길 선택하든가.

투숙일수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숲에서 마주친 데이빗을 마취총으로 쏠까 말까 고민하는 로버트처럼 우유부단하면, 죽는다.


숲 ≠ 호텔

데이빗은 비정한 여자를 제압하고 숲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그는 숲에서 독신자 공동체(이하 숲)와 합류하는데, 이들이 사랑을 접근하는 방식은 호텔의 그것과 상이하다. 크게 두 가지 면에서 그렇다.

 

1. 수단으로서의 사랑

세련된 호텔이 사랑을 대하는 방법은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투숙객들 앞에서 호텔 직원들은 왜 커플로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 나은지 상황극을 통해서 설명하는데, 이때 그들은 전혀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가 있으면 좋은 이유는 밥을 먹다 기도에 음식이 걸린 채로 질식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고, 여자에게 있어 남자가 있으면 좋은 이유는 길을 가다 모르는 남자에게 강간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커플 사이에 불화가 있으면 호텔에선 아이를 배정시킨다. 아이가 있으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로 있으려면 둘이 되어야 하고, 둘로 있으려면 셋이 되어야 하는 것이 도시의 규칙이다.

 

2. 목적으로서의 사랑

그러나 숲은 그렇지 않다.

숲은 구성원이 짝을 짓는 것을 금지한다. 키스하다 발각되면 두 사람의 입술을 베고 다시 키스를 시킨다. 자세하게 묘사되진 않지만 섹스하다 발각되었을 때도 비슷한 원리로 벌을 주는 것처럼 암시된다.

생각해 보면 숲은 애초에 그런 이분법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탈출한 것은 짝을 지으라는 강요였지, 짝을 짓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에서 하나는 계속 하나로만 있어야 한다.

나는 숲의 규칙이 증오와 보복성과 자기부정적 성격이 강하다고 느꼈다.

숲으로 도망가기 전 호텔에 있는 동안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에 대한 좌절감, 정부가 사람들로 하여금 짝을 지으라고 한 공간에 가두는 것에 대한, 곧 체제에 대한 원칙적인 반대 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에서/사회를 거부당한/거부한 사람들이 모여서 뒤틀린 원칙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말해, 강압적인 시스템만 경험해 본 사람들은 그 억압에서 빠져나온들 강압적인 시스템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숲에서는 수단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하는 사람들만이 이 원칙을 어길 수 있다.


숲 = 호텔

그러나 숲은 호텔과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은 공간이다.

 

경계를 경계하는 태도는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숲의 구성원들은 모두 자기 묫자리를 미리 파놓고 살아간다. 살아있는 동안 그 정반대의 상태를 유념하게 되는 것이다.

덫에 다리가 걸린 구성원에게 지도자가 하는 말도 맥락이 비슷하다. ‘알아서 해결해라. 덫을 풀었다면 곧장 우리에게 달려오든가, 출혈이 너무 심할 것 같으면 곧장 묫자리로 들어가든가.’ 지금 당장 그 경계에 있을 땐 일절 도와주지 않는 것이다.

 

이분법을 주입시키는 데에 폭력이 수반된다는 것도 호텔과 동일하고.

 

경계인들은 호텔만큼 숲에도 많다. 데이빗이 숲에서 사랑에 빠지는 여자는 근시이다. 숲의 지도자조차도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이따금씩 도시로 나갈 때 자신의 부모님도 겸사겸사 만나고 온다.

 

숲 < 호텔?

나아가 숲이 도시와 대등한 공간이 아니라 심지어는 종속족인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데이빗, 근시 여자, 지도자 뿐만 아니라 숲의 사람들 모두가 일정 부분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숲은 도시에 물질적으로 의존한다. 물자를 위해 도시인의 선의(메이드)에 의존하기도 하고 변장하고 직접 도시로 들어가기도 한다. 반면 호텔(= 도시)은 숲 없이도 멀쩡히 돌아갈 것이다. 이따금씩 송로버섯의 풍미가 그립긴 하겠지만.

숲의 기능을 봐도 그렇다. 숲은 투숙객들이 사냥을 통해 투숙일수를 늘리거나 유희를 즐기는 곳이다. 사람을 향해 마취총을 쏴대고 얼굴에 주먹질을 해도 투숙객은 결코 침입자일 수 없다. 그곳을 무단점거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독신자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쪽에 도시를 두고 다른 쪽에 숲을 둔 채 틀린그림찾기를 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바로 도시와 숲의 비교•대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사실이다: 사랑은 강하고, 인간은 나약하다는 것.


사랑은 강하다

도시와 숲은 분명히 정반대의 기치를 가지고 있는 공간이다. 도시는 짝짓기를 강요하고 숲은 짝짓기를 금지한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은 호텔에서는 사랑하지 못하고 숲에서 사랑한다.

 

사랑은 당신이 원할 때 찾아오지도 않고 원하지 않는다고 원할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기 마련이니까.

당신은 사랑에 ‘빠진다’. 토끼가 숲의 사람들이 숨겨둔 덫에 걸리듯.

 

사랑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우리보다 강하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보다 강하다.


인간은 나약하다

숲의 구성원들은 호텔에 침입해서 호텔 매니저 부부를 협박한다.

숲의 지도자는 매니저의 남편에게 총을 겨누면서 그에게 아내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묻는다. 15점이 만점이라면, 그의 사랑은 몇 점이냐고.

남편은 자신의 사랑에 14점을 매긴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신들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자 자기는 아내 없이도 잘만 살아갈 수 있다고 어필하고, 이어서 지도자가 그에게 아내를 쏘라고 피스톨을 건네줬을 때 그는 큰 주저없이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피스톨에 총알은 없었지만, 무언가가 분명 부서졌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얼만큼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내 대신 총알을 맞고 죽을 수 있는 15점짜리 사랑이 아니면, 결론적으로 모두 0점짜리 사랑과 차이가 없으니까. (이분법의 폭력이 또 한 번 등장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절박한 상황에서 간사해지는 것은 숲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숲의 지도자는 근시인 여자가 데이빗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근시를 치료해주겠다는 핑계로 그녀를 도시로 데리고 가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린다.

데이빗과 그 여자 사이의 사랑은 서로의 행동만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는, 말하자면 눈으로 한 사랑이니까. (눈이 잘 보이든가 아예 멀어버리든가. 이분법적 폭력의 짤막한 재등장이다.)


그리고 근시'였던' 여자가 스스로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가장 먼저 하는 말도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야?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잖아“이다.

맞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죄는 두 사람이 저지른 것이고, 데이빗 또한 근시가 있었으니까 명분은 충분했다.


+ 인간은 나약하다, 어디 있든

그러나 '왜 지도자는 데이빗이 아닌 여자를 눈멀게 했는가'보다 다 중요한 질문은 ‘왜 여자는 그런 질문을 했는가’이다.

 

호텔 매니저의 남편이 왜 아내를 배신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도시인들에게 사랑은 애초에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혼자 밥 먹다 질식사 하지 않기 위해, 길을 걷다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

그러니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 사랑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생겼을 때, 매니저 남편은 당연히 그 선택지를 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지 말라는 원칙을 어겨가면서, 사랑이 목적 그 자체인 사랑을 한 근시 여자(이하 맹인 여자)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인간은 간사하니까. 아니, 나약하니까.

또, 보편적 인간성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니까. 장소를 들어 굳이 따진다고 쳐도, 애초에 숲에 있는 사람들 모두 도시에서 나고 자랐던 사람들 아닌가.

 

나약한 것은 맹인 여자만이 아니다. 데이빗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맹인이 된 이후 토끼를 잡아다 주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그녀가 테니스공을 키위라고 착각해도 맞았다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도, 모두 더 이상 그녀를 예전만큼 사랑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던 데이빗의 헤메임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결말

여튼, 두 사람은 도시로 도망간다. 그리고 데이빗은 한 식당 화장실에서 거울앞에 서서 스테이크 칼을 쥔 채, 그 칼로 자신의 눈을 찔러야 할지 말지 갈등하고 있다. 화장실 밖에서는 여자가 자리에 앉아 데이빗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화면이 암전된다.

 

데이빗은 과연 어떤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영화는 교묘하게 관객들로 하여금 가능한 결말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맹인 여자의 모습이 과연 데이빗이 고민하고 있는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모습인지, 아니면 이미 한참 전에 눈을 찌르지 않고 화장실을 나와 식당을 떠난 데이빗을 영문도 모른 채 하염없이 기다리는 모습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화면 암전 후 나오는 파도소리도 그렇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에는 랍스터가 되어버린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력이 낮은 랍스터처럼 시력을 잃고 바다보다 사랑하는 여자와 둘만의 세계에 잠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1)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으로 여겨지는, 특히 예술작품에서 자주 다루는 초낭만에 대한 환상 그리고 2) 이분법적 사고의 폭력성을 풍자하는 영화이다.

 

제3의 결말은 있다.

사랑에 (말 그대로) 눈 먼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애인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스테이크 칼로 눈을 찌르지 않아도 괜찮다.

안경을 낀 채 그녀 곁으로 돌아가라. 그녀의 눈의 되어줘라.

그래도 사랑이다.

 

단상

1. 개로 변한 데이빗의 형이 데이빗이 자신의 인간일적 모습에 대해 머리가 벗겨졌다고 묘사하자마자 짖는 것은 깨알같은 웃음 포인트

2. 숲으로 도망쳤다가 잡힌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혹시 가축으로 바뀌어 투숙객들의 식사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닐까? 비정한 여자가 말했던 ‘아무도 되고 싶지 않은 동물’도 가축 아니었을까?

3. <더 랍스터> 속 세상의 연애/결혼문화는 어떤지 궁금하다. 단 한 번이라도 그런 호텔에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미성년자일 때부터 천생연분을 만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4. 데이빗, 로버트, 존이 자신의 경계적 특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흥미롭다. 시력이 나쁜 데이빗은 동물이 되어서도 시력이 나쁜 랍스터가 되길 원한다 (그게 이유는 아니지만). 발음을 잘 못하는 로버트는 동물이 되었을 땐 인간의 말을 가장 잘 따라하는 앵무새가 되고 싶어한다. 다리를 저는 존은 동물이 될 가능성을 일체 배제하고 직립보행하는 인간으로 남아있고 싶어한다.

5. 돌이켜보니 여자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이 없다. 사랑은 사람의 이름을 알았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는 어떤 특성을 포착하면서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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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5 익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후자(이미 떠나버린)로 받아들이고, 감독의 매정함에 기립박수를 쳤던 작품이라 깊이 기억에 남아있네요ㅎㅎ
1 코끼리나방  
칭찬 감사합니다!
저는 엔딩을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데이빗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다만 결론과 관련해서는 데이빗이 두 눈 멀쩡한 채로 맹인 여인에게 돌아가길 바라는 제 희망사항만 있을 뿐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