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악은 평범하다.

영화감상평

RED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악은 평범하다.

1 이규하 0 5890 0
한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몇 년전 세상을 떠난 아내가 선물한 RED라는 이름의 개를 14년 동안 키워왔다.

RED는 노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함께 했다.

어느 날 노인은 운영하는 잡화점을 잠시 맡겨두고 근처 호수에 낚시를 하러 갔다.

RED도 함께였다.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는 노인과 RED의 뒤로

엽총을 든 세 명의 소년이 다가왔다.

17~8세 정도 밖에 안 된 어린 소년들은

노인에게 총을 겨누며 돈을 요구했지만

가진게 없는 노인은 점잖게 타이르기만 할 뿐이었다.

심술이 난 소년 중 한명이 별안간 RED의 머리 위로 방아쇠를 당겼다.

소년들은 정말 이름처럼 피로 붉게 물든 RED를 내려다 보며 낄낄거린 후 떠났다.

노인은 망연자실한 채 집으로 돌아가 RED를 집 앞 뜰에 고이 묻었다.



사건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벌어지고 말았다.

사건의 마무리 역시 조용하고 확실하게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노인은 수소문 끝에 RED를 죽인 소년의 집에 찾아

소년과 소년의 부모에게 정중히 사과를 요구하고

비뚤어진 소년을 부모가 바로잡아야 한다고 점잖게 타일렀으나

소년의 부모는 자식 감싸기에만 급급했다.

자신의 아버지 뻘인 노인을 노망난 늙은이 취급하며

거만하고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소년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노인을 본 적 조차 없다고 잡아뗐다.

쫓겨나다시피 집 밖으로 나온 노인이 원했던건

정중한 사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노인은 소송을 걸기 위해 친구인 변호사를 찾아갔다.

허나 증거조차 부족하고 소년의 아버지는 지방의 재력가였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미성년자이고 동물학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처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송을 걸기에 충분한 돈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노인은 진실을 원했다.

RED는 지방 재력가의 아들 패거리에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진실.

그것이 진실이었다. 허나

현실에서 진실로 인정받는 건

그 진실이 헛소리라는 것이었다.

노인이 아무리 소리높여 진실을 외쳐봐야 돌아오는건

RED를 쏴 죽인 소년들과 그 소년들의 부모의 비웃음 뿐이었다.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면 지를수록

손해를 보는 건 노인 쪽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아니 우리 사회에도 이미 만연한 여러가지 문제들의 본질을 꼬집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것 처럼 악은 평범하다. 우리가 무심코 한 행동이 바로 악 그 자체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악은 무관심과 나르시시즘에서 기인한다.

나는 항상 옳고 내 편은 항상 선하다고 믿는 순간

너는 항상 그르고 상대편은 항상 악하다고 믿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내 편이 악惡이 될 가능성은 커진다.

이 영화는 바로 惡이 되어버린 무관심과 나르시시즘을 꼬집고 있다.

소년들이 저지른 행위는 분명 끔찍한 행위였고

부모는 소년들의 惡한 행동에 대해 따끔하게 야단치고

노인에게 사과할 수도 있었다

허나 소년의 부모들은 그러지 않았다.

내 새끼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럴리가 없다는 거다.

사실 부모 또한 자식이 그러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이나

그들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들이 내 편이라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나와 내 편은 무조건 옳고 당신이 틀렸다고 몰아부치는 태도

이 태도야 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러가지 문제의 본질이라는 진실

이 영화는 한 노인의 목소리를 통해 이러한 진실을 외치고 있다.





간만에 괜찮은 영화였다.

그랜토리노와 비교해도 좋을 수작이었다.

더불어 명배우 브라이언 콕스의 명연기와

악역은 정말 타고난 듯이 잘하는 톰 시즈모어의 연기도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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