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뚱 맞은 애니 감상문 "빨강머리 앤" (스포일러? = 있슴)

영화감상평

생뚱 맞은 애니 감상문 "빨강머리 앤" (스포일러? = 있슴)

1 FE 3 252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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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강의 EQ의 소유자, 감수성의 화신, 그리고 착한 그녀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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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은 어릴 적에 TV에서 본 기억이 조금 남아 있던 애니였습니다.
최근에 "미래소년 코난"과 함께 다시 보게 되었는데,
두 작품 모두 정말 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더군요.
"미래소년 코난"이 특히 소년들이 좋아할 애니라면
"빨강머리 앤"은 분명히 소녀 취향의 작품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30대의 남자인 제게도 마음 속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 순정만화(? 원래 엄연한 소설)의 주인공에 이렇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당시의 우리말 주제가에도 나오듯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의 이 볼품 없는 소녀의 이야기가
어째서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재미와 가슴을 후벼파는 진한 감동을 주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에는 극적인 상황과 드라마틱한 사건도 나오지 않으며
뜨겁고 화려한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고아 소녀의 성장 과정의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템포로 진행될뿐이죠.
하지만, 그 어떤 극적인 내용의 소설보다도 재미와 웃음과 감동을 주는 불후의 명작임에 분명합니다.
원작 소설인 "초록색 지붕집의 앤"이 워낙 훌륭하기도 하지만,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뛰어난 재능과 만나서 탄생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은 말 그대로 영원불멸한 작품으로 남을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 부모를 잃고, 어느 한 곳 의지할 곳 없이
모두에게 외면당하며, 이리 저리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가엾은 고아 소녀.
그리고, 조금은 괴팍하다고 할 수 있는 성격들 탓인지
( 그 사연을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을 할 수 없지만 )
결혼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두 늙은 오누이가 이 소녀와 만나게 되는 과정은,
비록 착오에 의한 잘못된, ( 딴엔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
분명히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 아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등장합니다.
바로 앤이라는 소녀가 그 어떤 이도 상상하지 못할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거죠.
황소같은 고집에 불 같이 화를 잘 내는, 홍당무처럼 빨강 머리를 가진 주근깨 투성이.
저는 이 부분에서 제가 어린 시절 TV에서 보았던 또다른 방영물인
"말괄량이 삐삐"를 생각하게 됩니다. ( 물론 앤이 더 예뻐요. ^^; )
내용상, 장르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작품이지만,
주인공 두 사람의 이미지가 외모상으로나 성격상 몇몇 상당한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상상력에 관한 것입니다.

앤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을 정도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있습니다.
그 상상력은 공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감성과 함께 명석함까지 갖췄죠.
게다가 고집불통에 비록 화를 잘 낸다고는 하여도,
그 가슴속엔 진실로 따뜻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며
자신이 그들에게 무엇인가 해 줄 수 있슴에 더욱 기뻐하는 모습에서 그걸 알 수 있습니다.
"반으로 나눠 먹으면, 두배로 더 맛있을 거야."
매튜로부터 초콜릿 캐러멜을 받았을 때에도 맛있는 것을 먹게 되었다는 즐거움보다
친구인 다이애너에게 자신도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기쁨을 먼저 생각하는 장면이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었죠. 심지어 어린 미니메이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마릴라도 이야기합니다.
"저 아이의 좋은 점은 인색하지 않다는 거에요."

마릴라가 앤을 다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려 스펜서 부인의 집으로 가는 동안의 마차에서,
앤이 마릴라에게 털어놓은 그 동안의 성장 과정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앤은 말 그대로 불우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기는커녕
맡아 길러 주었던 집안마다 제대로 된 곳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지나친 애정으로 오히려 삐뚤어지기도 하는 요즘의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면,
앤은 애정에 목말라 죽어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성장사를 가졌습니다.
( 실제로, 유아기 때에 어머니와의 스킨쉽이 없으면 건강과 지능이 매우 안 좋아진다는 것이
과학적인 조사 결과로도 밝혀져 있습니다. )

이야기 초반의, 레이첼 린드 부인의 고아 입양에 대한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갖는 고정관념일 수 있는, 고아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된 이유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랄 수밖에 없는 어린 고아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될지 모를
성격상의 문제점을 일반인들이 지나치게 과장해 보게 된 선입견일 것입니다.
앤 역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체념하며 삐뚤어진 성격이 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어린 시절 사람이 받는 애정이란 그 사람의 성격과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앤은 힘들고 괴로운 환경속에서도 자신의 상상의 눈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스스로 창조하고 그 속에서 결코 때묻지 않는 착한 성격을 유지해 왔습니다.
사람의 성격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성과 함께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을 분명하게 받게 되는데,
앤은 자신의 그 타고난 풍부한 감성과 착한 성품을 어려움 속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그런 성격을 더욱 키워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앤은 이야기속 린드 부인의 말에서도 나오듯
일반적인 아이들을 보는 잣대로는 결코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또 하나 앤의 큰 장점이라면 매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눈입니다.
그건 불우한 어린 시절에 반해 쾌활한 성격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이야기의 끝 무렵, 마릴라를 위해서 대학을 포기하는 힘든 결정을 할 때에도
"비록 곧게 뻗은 넓은 길을 포기하고, 구부러진 길모퉁이를 지나게 되었지만,
그 길에서도 희망과 꿈을 품고 나아가겠다. 오히려 구불구불 힘든 길을
지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인정과 우정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에서
너무나 의연하고 밝은 마음이 느끼지죠.

어린 시절의 그 모든 힘들고 괴로운 일들을 이겨내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앤의 긍정적 사고 방식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앤이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운명이었다면
그 이후에도 우리가 아는 앤으로 끝까지 자랄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바로 그 부분에서는 마릴라와 매튜의 공도 크겠죠.

대인관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매튜는 이 천진하고 재미있는 소녀에게 푹 빠져
깊게 사랑하게 되어 버렸고 ( 이걸 이상하게 해석하시는 분은 없겠죠? ^^;; )
마릴라 역시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앤을 기르면서 다정다감한 어머니로서의 자신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죠.
불우했던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를 가슴속 깊이 사랑해 주며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합니다.

루시 M 몽고메리 여사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결코 교훈적이거나 설교적인 투의 그런 단조로운 내용이 아닌,
정말로 옆에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인물과 성격의 창조를 통해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내었습니다.
제 언어적 상상력으로는 좋은 찬사의 말이 생각이 안 나네요.


끝으로 이야기 후반부, 저를 가장 가슴 뜨겁게 만든 몇장면을 꼽자면...

앤이, 마릴라가 지어 준 모임옷을 입고 두 사람 앞에서 시 낭송을 할 때
어린 시절의 앤을 떠올리며 눈물 흘리는 마릴라에게 앤이 안기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주머니, 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다만 모양이 조금 다듬어지고 가지가 퍼졌을뿐이에요.
진짜 앤은 그 뒤에 있구요. 지금까지와 똑같아요. 정말이에요.
어디를 가건 외모가 얼만큼 변하건 마음속은 언제나 아주머니의 어린 앤이에요.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이 초록색 지붕집의 작은 앤인걸요."

그리고, 밖으로 나간 매튜는 밤하늘을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렇구먼. 저 아이를 그렇게 응석받이로 키운 건 아니었어.
이따금 내가 감싸준 것도 별로 해롭지 않았구 말이야.
저 아이는 영리하고, 아름답고, 게다가 무엇보다도 좋은건 착한 아이란 거지.
우리에게 있어서 큰 은총이었어.  스펜서 부인이 실수를 한게 운이 좋았단 그 말이야.
더욱이나 그게 운이라고 친다면 말이지... 아무래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걸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일지도 몰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저 아이가 필요하다고 인정을 해 주신 걸꺼야. "

또, 자신이 남자아이였다면 아저씨에게 더 큰 도움이 되고
편하게 해 드렸을 것이라고 말하는 앤에게
"난 네가 이 집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네가 남자아이였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남자 아이 열명보다도 네가 있어 주는 것이 더 좋단다. 그렇지.
에이브리 장학금을 따낸건 남자아이가 아니야. 여자 아이야.
내 딸이란다. 내 자랑스러운 딸이란 말이야. 앤은 내 딸이야... "
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더군요.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에 대한 사랑을 느껴 보지는 못했지만,
제 누이동생이 낳은 조카딸을 처음 병원에서 안아 보았을 때 그 느낌,
그리고, 지금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같이 놀아 줄 때,
간접적으로나마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의 사랑이 마릴라와 매튜의 앤에 대한 사랑에
다를 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앤처럼 그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앤처럼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고 있는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땅히 되어야 할 많은 것을
이 "빨강머리 앤"이란 작품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럴 것이지만, 이 애니를 접하고 감동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주위의 어린 조카, 아들, 딸들에게 꼭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
백마디의 설교보다도 이 애니 한편을 보여 주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비록 소설속의 인물이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저런 여자가 있다면 정말로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습니다.
길버트 같은 남자가 되려고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매튜 아저씨의 말씀처럼 마음속에 조금은 낭만을 남겨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상상력도요. ;)


* 덧말  :  이 애니를 보신 많은 분들이 느끼실테지만,
앤의 우리말 더빙을 한 성우분들의 뛰어난 목소리 연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죠.
특히,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어린 앤의 목소리부터 성숙한 처녀 앤의 목소리까지
앤의 성격을 목소리로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셨던 고 정경애님을 잊을 수가 없군요.
몇년전 괌에서 일어났던 비행기 사고로 남편, 아드님과 함께 세상을 등지셨다고 하죠.
너무나 비극적인 불행을 당하신 분에게 애도의 표현도 부족하네요.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

마릴라와 매튜, 다이애너, 그 외 인물들의 목소리를 연기하신 여러 성우분들도
완벽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 애니를 200% 이상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우분들께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답니다.
특히 저는 매튜 역의 김인배님의 온화한 목소리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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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G 안상균  
  소년 ..미래소년 코난 ,소녀... 빨간머리 앤..
잘 지적하셨네요..
소년 소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애니 아닐까 하네요..
 말이 필요없는 애니죠..특히 앤은 자극적이지도 우리나라 드라마같이 뻔하고 몰입하기 쉬운 내용 아니면서
 스토리 느낌을 아주 잘살렸어요..앤같은 멜로 영화 찾기도 엄청 힘들지 않나 싶네요..
1 화영웅  
  원작 소설의 느낌을 보다 잘 살린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1 유프린스  
  최근 다시봤는데도 그 감동의 도가니란;;;;;;;;;;;;;특별히 빠른 전개도 , 눈이 뒤집힐만한 스토리도,화려한 영상미도 없지만 보면서 미소가 떠나지 않더군요 ㅎ 꼭 한번 앤의 주무대 캐나다 무슨 섬으로 여행가보고 싶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