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싫은 쓴소리, 의 추억

영화감상평

하기 싫은 쓴소리, <괴물>의 추억

1 ROCK 1 2737 20
관객을 얼마만큼 몰입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영화감독들의 영원한 고민거리인 이 문제는 한 편으론 소비자 입장인 관객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얼마만큼 몰입할 수 있는 영화를 고를 것인가. 아무런 잡념 없이 스크린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영화, 보고 나서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
취향에 따라 영화 고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모든 관객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재밌는 영화일 것. 몰입할 수 없는 영화가 재밌는 영화일 확률은 무척 희박하므로 만드는 감독이나 고르는 관객들 모두에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는 언제나 고민거리로 남는다.
이런 맥락으로 봉준호 감독의 2003년 作 <살인의 추억>은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이룬 모든 요소들은 시종일관 어느 하나 튀어나오거나 비틀린 곳 없는 조화를 이뤄 가슴 깊은 곳에 파동을 전하고 있었다. 그 울림은 탄식과 한숨으로 번지며 객석을 적막하게 만들었다. 왜곡되지 않은 영화의 진심에 몰입한 관객들이 만든 오싹한 침묵, 이전에도 이후에도 쉽게 맛볼 수 없었던 짜릿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살인의 추억>에 그토록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전체적인 짜임새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치밀하고 탄탄한 스토리 전개로 전형적인 스릴러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당시 시대상황을 적절하게 꼬집는 블랙코미디를 유연하게 뒤섞어 재미의 탄력을 배가시켰고, 캐릭터들의 심리상황을 헤집어 보이는 예리한 상황설정과 묘사들은 스크린 밖의 시선들을 쉽사리 필름 속으로 옮겨놓았다.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스크린 밖의 시선을 흡입하여 필름 속으로 옮겨놓고 마음 깊은 곳에 영화의 진심이 울리는 파동을 만들 수 있는 감독이었기에,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에 대한 벅찬 기대와 기다림은 당연한 것이었다. 과연 누군들 그렇지 않았을까.

<괴물>을 만나기 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속담을 곱씹으며 들뜨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고대했던 시간들이 만든 보상심리가 만만치 않았었나보다. 모든 이들이 <괴물>을 칭찬하는 시점에서 기대만큼의 영화가 아니었다고 되뇌고 있는 것을 보면. 혹은 찬사를 쏟아내는 이들보다 <괴물>을 고대하던 농도가 훨씬 더 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이유였던 간에, 대단히 아쉽게도 봉준호 감독의 신작 <괴물>은 내가 오랜 시간동안 기다렸던 영화는 아니었다.

<괴물>은 ‘현실’ 속의 한 가족과 ‘판타지’ 속의 존재 괴물이 정면으로 대결하는 영화다. SF 오락영화의 바탕 위에 가족 간의 따뜻한 느낌을 채색한 드라마이며, 현실과 판타지의 충돌로 발생하는 해프닝을 사회에 대한 쓴소리로 게워낸 풍자고발성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꼬집어 곪아터진 치부를 훤히 드러내고 다시 가족 간의 휴머니즘으로 이를 치유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한 재미와 공감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
세계 정상급 CG 기술팀의 솜씨로 만들었다는 괴물의 외형은 과연 명불허전,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같은 작품에 길들여진 시선으로도 흠잡을 곳이 거의 없을 만큼 만족스러웠고, <살인의 추억>에 연이어 호흡을 맞춘 주연 배우들의 열연도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블랙코미디의 설정들이 다소 황당하고 억지스럽긴 했지만, 송강호라는 당대의 해결사가 무난하게 소화해준 덕분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다.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적 성격을 골고루 발산한 무난한 영화, 돈들인 값을 충분히 해낸 영화. 영화 <괴물>에 대한 평가로 역시 무난한 것일까. 하지만 단지 무난하다는 평가로 지나치기엔 <괴물>은 뭔가 석연치 않다. 아무래도 과도한 기대감이 만든 보상심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그런 자위로 간단하게 넘겨버리는 것 역시, 개운하지 못하다.

일상의 나른함을 집어삼키며 등장한 괴물과 가족 간의 만남은 분명 우발적이었지만 곧 필연의 끈으로 이어지며 영화를 치닫는다. 애당초 <괴물>은 가족과 괴물이 해결해야할 은원의 문제가 이야기의 골자. 하지만 주제가 너무 단순하고 쉽다고 생각했을까. <괴물>은 가족과 괴물의 대결 속에 다양한 의미의 암시를 건다. 단순한 돌연변이 괴물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뒤집어 쓴 모순 덩어리의 괴물. 평화롭던 소시민 가족 앞에 갑자기 몰아닥친 모순 덩어리가 만든 비극의 우화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 감독의 생각이었을 것. 하지만 그 암시는 정치적 색채가 강해서 오히려 스크린에 깊이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생긴다. 특히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우여곡절의 에피소드는 주제와 완벽하게 부합하지 못하며 산만하고 희화적인 곁가지를 치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블랙코미디로 갈 것도 아니고, 막대한 투자와 노력으로 만든 첨단 디지털 괴물도 있겠다, 또한 반드시 괴물과 부딪쳐야할 다급하고 애틋한 가족의 사연이라면, 영화 이면에 암시를 걸기 이전에 보다 박력 있고 치밀한 대결에 치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의 골자와 완전하게 밀착하지 못한 주변 요소들 사이엔 미세한 균열이 생겼고, 그 틈새는 <괴물>의 진심에 다가서려는 발길을 헛딛게 했다. 시선으로부터 온 마음까지 다 빠져드는 몰입을 다시 한 번 기대했던 사람으로서 <괴물>은, 그렇게 석연치 않고 개운치 못한 추억을 남긴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감 없이, 아무런 보상심리 없이 <괴물>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좀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살인의 추억>을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잡다한 추론을 해봐도 <괴물>을 보며 느낀 균열의 흔적은 쉽게 지울 수 없다. 나에게 재밌는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영화다. <괴물>이 못내 아쉽고 아깝지만 그 짜릿한 즐거움을 이미 한 번 선물 받았기에, 하기 싫은 쓴소리를 내뱉는 것이나 다시 지루한 기다림을 시작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극장가는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감독이 갈수록 줄어드는 요즘, 그의 영화만큼은 기다리는 시간조차 즐겁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시 생각해봐도 <살인의 추억>과 <올드 보이>,<장화 홍련>을 연이어 볼 수 있었던 200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1 Comments
1 은빛연어  
잘 읽었습니다. 오늘 저도 괴물을 보고 왔는데.. 자꾸 [살인의 추억]이 떠오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