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하는 어둠과 모호함의 정치학

영화감상평

<우주전쟁>이 전하는 어둠과 모호함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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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아래 어디 있을 갸륵왕검님의 부정적 시각과 대조해서 한번 읽어보세요. 원출처
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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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848 <우주전쟁>을 보는 긍정적 시각 소개(밑의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보고..)
name : 박서훈    hits :12    / date : 2005.11.06 11:06:00 
 
<우주전쟁>이 전하는 어둠과 모호함의 정치학

 
 
<우주전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장 어두운 영화다. 그의 초기 SF <미지와의 조우> <E.T.>에서의 우호적 외계인의 방문이 여기서 적대적 외계인의 침공으로 바뀌었다는 점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이 설정은 H. G. 웰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택했을 때, 그리고 오슨 웰스가 이 소설을 토대로 만든 라디오극 대본을 스필버그가 입수했을 때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자 한 아버지가 아들과 딸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한다. 결국 외계인은 소멸되고 가족은 포옹한다. 이건 재난 장르와 미국식 가족드라마의 전형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렇게 설명되고 광고되고 있다. 그러나 <우주전쟁>은 훨씬 더 풍부하고 복잡하며 모호하다.

<우주전쟁>의 주인공 페리어는 스필버그 영화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비루하며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물이다. 또한 재난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완전히 부적합한 인물이다. 웰스의 같은 소설을 각색한 바이런 해스킨의 <우주전쟁>(1953)에서부터 최근의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딥 임펙트> <투모로우>까지 SF/재난영화의 영웅은 한결같이 전문가(기술자 혹은 과학자)들이다. 그들은 제도와 관료들을 대신해 재난의 정체를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혼남인 페리어는 뉴저지의 무식한 부두노동자이고 동료애도 없으며 게으르고 서투르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며 어딘가 야비해 보인다. 여피의 윤기와 귀티가 넘쳐흐르는 톰 크루즈에게 이런 배역을 맡김으로써, 스필버그는 처음부터 관객의 기대를 비켜간다. 이 한심한 주인공은 자신에게 하룻동안 맡겨진 아들과 딸을 도피시키는 것 외엔 어떤 의지도 능력도 없다.

전쟁이 아닌 도피의 로드무비
<우주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피난의 영화이며 도피의 로드무비다. 외계인의 정체와 씨름하는 전문가와 정치 지도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무력한 군인들만 피난민 대열을 스쳐간다. 영화의 대부분은 페리어 가족의 도피 여정이다. 우리가 만나는 건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이해되지도 않고 극복될 수도 없는 거대하고 잔혹한 힘, 절대 공포다.

<우주전쟁>의 뛰어난 이미지들은 도심 도로가 들끓다 폭발하고 거대한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초반 장면들이 아니라(이런 종류의 스펙터클은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보다 특별히 나을 게 없다), 피난민 대열 앞을 미친 듯이 달려가는 불타는 기차, 허드슨 강을 가득 메우며 흘러가는 시체들, 피를 먹고 태어난 징그러운 식물들의 꿈틀거림,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죽은 이들의 찢긴 옷조각들, 시체들의 피로 염색된 들판과 저녁놀 같은 초현실적인 공포의 이미지들이다.

가장 흥미로운 시퀀스도 페리어와 딸이 숨어든 정신이상자 오길비(팀 로빈스)의 지하실 장면이다. 아나콘다 모양의 기계 촉수와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벌이는 수색과 내부의 정신이상자로부터의 위협 사이에서 페리어 가족은 기나긴 침묵의 공포에 휩싸인다. 여기서 페리어 가족이 직면한 것은 미지의 타자가 생산한 외적 재난을 넘어 내적 붕괴에 이른다. 오길비는 싸우겠다는 의지만 남고 판단력을 잃어버린 인간, 곧 전쟁광이다. 이런 광기는 생존을 위해 타인을 무한 살육하는 피난민들의 행태에서 예고된 것이며, 페리어의 아들에게도 전염된다.

<우주전쟁>이 전하는 건 재난의 스펙터클과 제어의 쾌감이 아니라, 재난을 확대재생산하는 인간들의 내면적 붕괴다. 그 재난의 서식지는 알 수 없는 타자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 외계인들의 소멸은 지구의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는 모건 프리먼의 내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 과정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이 갑작스레 제시되는 이 내레이션은 허탈감마저 안긴다.

그것은 웰스의 원작의 결말에 지나치게 충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재난이 페리어의 한바탕의 악몽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보스턴의 전처 집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고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외계인과 싸우겠다고 달려간 아들도 어느새 그곳에 도착해 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페리어의 동선 밖의 외계인은 전혀 영화에 나오지 않았다. 이 해피엔딩은 평온하지 않고 괴이하며, 페리어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그는 무엇을 겪은 걸까. <우주전쟁>을 하나의 장르에 포함시켜야 한다면 재난도 SF도 아닌 호러다. 이 영화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9·11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
<우주전쟁>의 흥미로운 점 가운데 하나는, 재난의 스펙터클에 대한 영화감독의 자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계인의 전투기계가 묻힌 도심의 도로가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경찰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사람들은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한다. 구경거리의 매혹은 저항하기 힘든 것이다(재난영화의 계율 ‘사람들은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자기 장례식마저 보고 싶어한다’). 외계인이 처음 피격한 것은 자신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이며, 가까이서 구경한 사람일수록 빨리 징벌된다.

지하실 장면에서 오길비를 살해하기로 결심하며 페리어는 딸의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린다. 문을 닫고 살해할 것이므로 불필요한 행위다. 이건 봐서 안 되는 장면임을 서사 밖에서 일러주는 행위다. 당연히 관객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 장면들은 살육의 스펙터클의 물신화가 얼마나 지독한 비윤리적 중독인지를 드러낸(동시에 5천여명의 육신이 찢긴 쌍둥이 빌딩 충돌 장면은 결코 물리지 않는 ‘장관’이었다) 포스트 9·11의 미디어에 관한 스필버그의 비평이다. 스필버그 자신은 면책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우주전쟁>에는 재난의 스펙터클로부터 거리두기의 안간힘이 있다.

<우주전쟁>의 모호하면서도 흥미로운 또 다른 요소는 가족주의와 계급/지역 정치학의 긴장이다. 페리어는 뉴저지의 부두노동자이며 그가 사는 곳은 다리 밑의 하층민 거주지다. 전처 부부와 아이들이 사는 곳은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보스턴이다.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고 있는 페리어는 아들이 보스턴 레드삭스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낸다. 그리고 그는 딸이 주문한 야채 음식을 먹지 못한다.

더 중요하게는 외계인은 뉴저지의 노동자들을 살육하며 등장했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보스턴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페리어는 거의 강박처럼 아이들을 보스턴에 데려가야 한다고 믿는다. 막상 그곳에 도착했을 때, 페리어는 웃지 못한다. 그곳은 자신이 통과한 지옥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쉬어갈 수 있겠지만 여기에 속할 수는 없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불길하게 엔딩신을 감싸고, 페리어의 불안한 얼굴은 프레임을 채운다. 이 장면을 해피엔딩이며 가족주의적 화해로 보기는 힘들다. 눈물 겨운 가족애도 메울 수 없는 계급/지역간의 심연이 거기에 있다.

<우주전쟁>의 재난은 페리어 개인의 악몽이 아니라 하층민의 악몽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악몽은 결국 해소되지 않는다. <우주전쟁>은 디스토피아의 낭만적 허무주의보다 훨씬 냉혹하며 다의적인 묵시록적 비전의 영화다. 스필버그는 전진한다.
 
 글: 허문영 영화평론가, 전 씨네21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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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Comments
1 ILmare  
  음, 역시 영화평론가다 라는 말이 나오는 글이네요.
우주전쟁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좋은 글이고,
저 또한 흥미있게 봤던 영화라..
글 잘봤습니다.
1 조원석  
  제기억으론 이 영화가 첨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제작 상영된적이 있는걸로 기억합니다만( 기계눈이 사람 찾는 장면이 기억이 남)
 근데 무식한 노동자라는 표현이 왜케 눈에 거슬리는 건지..ㅎㅎ
게다가 미국인은 우리와 달리 죽도록 아둥바둥거리며 살지 않고 좀더 자유스럽게 사는걸로 아는데~
1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글 읽으니 이해가 많이 되네욤.....
글구 윗분...미국에도 죽도록 아둥바둥거리며 사는사람도 있습니다...
1 j  
  수많은 미사여구. 남의 작품에 이렇고 저렇고 평가하고 점수매기고. 평론가는 스스로 그런 작품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남의 작품도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전문가라면..
 그리고 심하게 포장하는 그 수식어 다 빼고 필수 어휘만 남기면 원고 분량 맞출 수 있을까.. 지나친 수식어는 독자로 하여금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뿐 아니라 단지 독자를 화려한 문장으로 현혹시키려는 의도에 불과하다.
평론가들 그렇게 잘 알면 직접 작품활동 해보는건 어떨까.
제일 궁금한건 직접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도 그런생각을 하면서 만들었을까? 아니면 단지 평론가들의 과대포장 억지 추측일까.
아는게 많은 것과 직접 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1 ILmare  
  j // 평론가는 말 그대로 평론가입니다.
영화라는 하나의 학(學)을 분석하고 논하는게 평론가이지요.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의 몫이지 평론가의 몫이 아닙니다.
j 님의 말을 다른 비유로 바꾸자면
야구해설가가 해설을 하려면 야구선수만큼 하라는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지나친 수식어와 전문적인 어휘로써 단지 꾸며진 글로만 비춰질 수도 있고
설령 감독의 의도가 평론가들의 의해 왜곡되거나 부풀려 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 않겠습니까.
평론가들의 해석을 통해 영화의 다른 면을 발견 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평론가들의 존재의 이유로 충분하지요.
2 칼도  
 
일마레님의 것과 같은 합리적 의견을 접하는게 그리 쉽지가 않아요.
한국에는 평론에 데인 영화 애호가들이 많은 모양이에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연상되는 아이디를 갖고 계신데, 아직 안가
보셨으면 서초초등학교 건너편에 있는 일마레 한번 가보세요.
1  
  평론가의 말이라면 무조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어딜가나 있죠..
일마레님 참 적절한 표현을 하셨네요..
1 김용훈  
  이런 평론가들의 평을 볼때마다 저는 불쌍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써 즐기지를 못하니까요...이 장면에서는 감독이 이런 의미로 했을꺼야...여기서는 이걸 나타내는 거야...하면서 장면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 가며 점점 자신만의 세계관에 빠져들어가는 평론들...
이 평론이야 말로 자신만의 세계관에 확실하게 빠져서 엉터리 평론을 내린 전형적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안타깝습니다.

정말로 이 평론대로 정말로 그런 의미도 있을까 라고 생각되시는 분들...
저런것들을 생각해 가며 다시한번 감상해 보십시요...
정말로 그런가...ㅡㅡ;;
18 redondo  
  1953년에 원작이 만들어졌었죠. 당시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져서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수상했을정도의 SF고전입니다. 50년대는 SF영화들의 황금기...였다고 합니다.
그후에 80년대에 TV미니씨리즈로도(1차침공 그후의 이야기로 전개) 만들어졌었구요. 또 이 소설을 라디오 방송하면서 실제상황으로 착각한 런던시민들의 소동을 줄거리로한 영화도 80~90?년대에 한편 더 만들어진걸로 압니다.
2 칼도  
 
그럼 그렇지, 영화 애호가 또 한분 납시었군..^^
1 전용민  
  평론은 또하나의 창작입니다. 모든 예술은 작가와 작품 사이에서, 작품과 감상자 사이에서 이원적으로 존재합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을 감상자가 발견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창작의 장입니다.

왜 영화를 비평하는가하는 문제는 왜 당신은 지금 숨을 쉬는가와 같은 질문입니다. 또한 영화의 비평에 있어서 구조적인 해석과 접근은 언제라도 즐거운 것입니다.

무엇이 됐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을 신포도취급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요.

댓글을 다시는 분들도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댓글 자체가 영화평론에 대한 또하나의 비평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난과 구분되어야합니다. 지금 댓글을 쓰신분들과 똑같은 이유로 영화평론을 하고 비평하는 것일 뿐입니다.

영화의 비평은 영화에 대한 인정과 반론이며, 감상자라는 거울로서 비춰보고, 유리로서 들여다보는 과정입니다.
1 neonike  
  글쎄요. 전 생각이 좀 다릅니다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이게 해주는것이 평론이며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이 만든 사람의 설명이죠. 감독이 흔이 알아서 해석하라든가 그런 말을 하기도 하고 아무말 안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위 말대로 봐서 그렇게 보인다면 괜찮겠지만 아니라면 문제가 있는거겠죠.

설명을 해도 관객이 잘 못알아듣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면(수긍하는것과 이해하는것은 다르죠.) 평론가나 감독에게도 문제가 있는거겠죠.

개인적으론 계급간 지역간 갈등을 이야기하는데 어처구니 없이 보스톤과 뉴욕이야기가 걸리는군요. 그 갈등은 원인은 메이저리그 아닌가요?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경중을 두는건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지역 정치학을 논하다니 좀 우습군요. 물론 그건 분명 지역 정치학에 들어가긴합니다만.

스필버그의 9.11에 대한 비평을 우주전쟁에서 느낀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군요.

배려가 부족한 영화라는 느낌입니다. 위 평론가는 광팬 아니면 일반화의 오류라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위에는 역공격에 대한 오류가 나왔죠.ㅎㅎ
1 강지석  
  관객은  재미에 집중해서 영화를보고
평론가는 감독이 표현하고자하는것을 평가하는건가.....
1 LiRose  
  평론에 대한 평가역시 평론만큼, 혹은 그 이상 가치있습니다.
다만,
'평론가들 그렇게 잘 알면 직접 작품활동 해보는건 어떨까' 이런류의
댓글이 아니라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