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영화감상평

[영화감상]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1 김수한 2 2174 0
(제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을 바로 올렸기 때문에, 말투라던지 단어가 상당히 거칩니다.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서.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보고 끄적인다.

시험과 시한부 인생은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정된 시간만을 부여받는 다는 점과 따라서 그 시간의 희소성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 시험이야 우리가 직접 겪고 있는 일이니 말할 것도 없고, 후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 '아는 여자'에서, 여주인공은 2달을 남겨둔 시한부 인생의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가를 묻는 '시한부 인생인 줄 아는' 남주인공의 질문에 그 2달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두 달 동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두달의 희소성을 충족시켜 줄, 그리고 그 두 달 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일거다.

그러나 시험과 시한부 인생은 큰 차이점이 있다. 시험은 성적표가 오고 시한부 인생은 성적표가 안 온다. 농담이 아니다. 즉, 시험은 결과 지향적이다. 잘봤던 못봤던 학점이 나오고, 그 학점으로 취직을 하고, 그 점수로 대학을 간다. 허나 시한부 인생은 결과가 없다. 죽으면 죽는 거지 죽은 후에 '잘 죽었다'(well-die)고 상 준다는 것 들어봤는가. 죽음은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어쨌든 'to be or not to be'다.

'욕망은 타자의 담론'이라는 라깡의 이론을 통해 바라보자면, 시험을 보는 이의 욕망은 무한하다. 시험은 잘 봐야 하기 때문에, 시험을 잘 보기 위한 행위 이외의 모든 행위는 욕망으로 돌아간다. 괜히 중도 2층에서 소설을 보고, 바에 가고 싶고, 기타를 만지작 거리고, 신작 영화에 끌리고, 여행도 가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고 하는 것들이 다 욕망이다. 다만 욕망은 욕망으로서 남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맘 속에 꾹 눌러두고 책상 위에 앉는다. 물론 그 욕망을 실현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미친놈' 혹은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세계에서 배제시킨다.

허나 죽으려고 하는 이는 욕망이 존재하지를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욕망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단 하나 있다면 '죽으려고 하는 욕망' 정도 일거다. 그리고 이는 사회에서 큰 제제를 받는다. 어쨌든 자살하는 자는 말리는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닌가. 잘못했던 안해던 "xx야 내려와. 엄마가 잘못 했어" 하는 사회 말이다. 그 말 듣고 내려갔다간 '잘못한' 사람한테 두들겨 맞기 밖에 더할까. 물론 아주 쪼~금 안아주기도 할꺼다. 영화에서 세라(SERA)는 그 사회를 대신한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조건부 동거에서 그녀는 결국 "병원에 가보자"는 말을 하고 만다. 여기서 그녀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별론이다. 그 말을 듣고 벤(BEN)은 그녀를 떠난다. 물론 개인이 사회를 떠나는 것은 뭔가 이치에 안맞는다. 벤은 동거녀의 집에서 다른 창녀와 자려는 '미친 짓'을 하고 쫓겨난다. 'Get out'이라는 한마디를 듣고.

세라는 이중인물이다. 이중 인격자가 아니라 영화 속에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는 존재이다. 위에서 말한 사회의 역할과 동시에 벤으로 하여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다.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생의 계속에 대한 욕망 역시도 불러일으킨다. 세라의 멋진 몸매에 벤의 손은 참지 못하고 계속 향한다. 허나 거기까지다. 안으려다 손가락으로 어깨를 두드리기만 하고, 옷을 벗기려다 아랫도리 위에서 멈춘다. 사랑의 영속성이라는 속성에 그는 부합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내가 널 영원히 지켜줄께."라는 말을 그는 못한다. 죽어가는, 죽으려고 하는 이가 어떻게. 또한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행위는 자신의 죽으려는 욕망과 상반되는 행위이다. 두 개의 욕망 사이에서 벤은 갈등한다.

세라 역시 비슷하다. 감기 걸린 여자친구에게 아이스크림 사다 주기, 공부 안하는 남자친구에게 게임 선물하기는 연인 사이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약은 못사줘도, 가만히라도 내버려둬야 할 것 아닌가. 세라는 그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낸다. 알콜중독자 벤에게 술병-큰 술병에서 술을 따라 편하게 마실 수 있는 병-을 선물한다.

아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벤은 세라와 헤어지고, 낡은 여관에서 죽어가다 세라에게 전화를 한다. 세라는 달려오고, 둘은 죽기 전 마지막 섹스를 한다. 여자가 위에 있었으니 소위 말하는 복상사도 아니다. 괜히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벤은 이미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로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거시기만 빼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죽기 전에 섹스를 한다는 것은 약간 거북하다. 섹스를 하다가 죽는 건 몰라도 죽기 전에 섹스를 하는 것은 격이 안 맞다. 죽기 전에는 사랑하는 여인의 볼을 한 번 쓰다듬고 미소지은 후에 조용히 가야 하는 것 아닌가. 또, 그냥 죽는 이도 아니고, 자기가 죽고 싶어 죽는 이가 무슨 섹스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허나 여기서의 섹스는 전의 섹스와는 격이 전혀 다르다. 전의 섹스-물론 미수에 그쳤지만-를 벤의 욕망의 산출물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섹스는 욕망이 아닌 욕구에 불과하다. 벤의 성기가 발기하는 모습은 '있는 그대로' 세라의 눈에 들어오고, 이는 벤이 자신의 요구를 산출하는 것이 아무런 저항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세라의 마지막 말에서 나오지만 세라 역시 그의 죽음을 받아 들이고 있었고, '죽어가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면서도 '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어가는 그에게 섹스는 죽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반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런 죽음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술에 대해 설명하자면, 술을 마시면 모두가 개망나니가 된다. 평소에는 공부만 하던 이도 신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 있고, 길바닥에서 엉엉 울 수도 있다. 그게 술이다. 즉, 사회적인 제제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술이다. 그러나 술은 한시적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엄청나게 큰 사회적인 제제가 다시금 돌아온다. 엄마한테 구박받고, 여자친구에게 혼나고 하는 제제 말이다. 우리 형법도 제10조 제3항에서 술먹고 개망나니 짓을 해도 그 개망나니 짓을 할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면 처벌한다. 예를 들자면, 신촌에서 술먹고 사람을 죽였는데, 술 먹기 전에 술 먹고 개망나니 짓을 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면 살인죄로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거의 할 수 있다고 본다.(법도 영화 감상에 쓰일 데가 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하는 벤에게는 그 제제가 별다른 쓸모가 없다. 유치장에 가둬놓으면 유치장에서 죽으면 되고, 누가 때리면 맞아 죽으면 되고, 어쨌든 죽으면 된다. 카지노에서 별 행패를 부려도 그냥 다음부터 안 가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박치기당해 코피가 나고, 등에 유리조각이 찔려도 어쨌든 죽으면 되는 것이니 별로 무섭지 않다. 그는 그가 말하듯이 '왕', 더 나아가 불사신이 된 것이다.

또한 술은 자신의 죽고 싶은 욕망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서도 작용한다. 어쨌든 술을 그렇게 많이 먹으면 죽으니까. 술로서 모든 욕망을 욕구로서 변화시켜 발산할 수 있고, 자신의 죽으려는 욕망 하나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 정말 멋지지 않은가? 가히 만병통치약이다.

술은 만병통치약이다.




결.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어쨌든 난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 어제 밤에도 이것 보려고 종일 공부했다.

세라 집주인이나 벤의 여관주인, 휴가지에서의 펜션 주인 등은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냥 넘어가고, 세라에 관하여서는 시험이 끝나고 다시 적어보련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아는 여자'는 시한부 인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 어쩌면 모티브를 따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라스베가스가 95년 작이니 아는 여자가. 나중에 천천히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인 감상은 나중으로 미룬다. 사실 너무 바쁘다.

추가1. 다 읽고 나서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벤의 개망나니 짓은 누군가가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할 때 일어난다. 즉, 욕망이 생기자마자 분출한다. 술이 있으니까.

'아는 여자'에서 남주인공은 주사가 없다. 그에게는 욕망이 없으니까. 야구선수가 감독에게 '공 받아서 뭐해.', '그래 미쳤다.'라는 말 할 정도면 볼장 다 본 것이니까. 물론 이 주인공은 이전에도 약간 겁이 없긴 했다. 자세한 건 생략.

추가2. 멋지지 않은가. 키스하려는 여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병에 물들어갈까봐 꽉 막고 있는 남자. 가히 멋진 포스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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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아놀드  
  감독과 각본에 음악까지.....1인3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마이크 피기스 감독의 유일한 역작...
스토리나 영상미도 좋았지만 전 OST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한동안 Leaving Las Vegas OST만 들었던 기억이....
후속작들인 원나잇 스텐드나 콜드크릭 등의영화에서는 실망감뿐..
하지만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이 한편만은 불후의 명작일듯...^^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1 배재훈  
  욕망은 진행형이죠. 끊임없이 진행하는 무서운 존재...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되고, 죽음이 종착역이지만 그 자체가 욕망의 끝이기에 욕망을 품은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와 라캉의 이론이라... 문제는 제작자들이 라캉을 의식했느냐의 문제인데... 미국에서 라캉은 최근에야 주목을 받는 인물일 뿐, 감독의 사상적 정신적 배경 속에는 자리잡고 있지 않은 인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