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 난해한 대화 형식은 왜 필요했을까?

영화감상평

이노센스~ 난해한 대화 형식은 왜 필요했을까?

1 황준하 41 2005 1
이노센스에 대한 글은 안 쓸려다가 대화 형식에 대해서 워낙 혹평의 글이 보여서 올립니다.

이노센스의 주제 내지 문제 의식에 대해서

제대로 쓸려면 이노센스의 특성상 장문의 글이 나와야 합니다.
(왠만한 리포트 수준은 될겁니다.)

이번에는 이노센스의 대화 형식에 대해서 쓰는 것으로 갈무리 지으려 합니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묻겠습니다. '난해하지만 철학이 없다는데 찔리지 않습니까?'

자신이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철학이 없다는 이야기로 밖에 안 들리네요.

아니면, 자기가 이해해야만 철학이지 자신이 이해 못하면 철학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럼 제대로 이노센스에 대해 쓰려면 왜 장문의 글일까요?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노센스의 대화 중 많은 부분이 유명 사상가의 책에서 따온 것입니다.

두꺼운 책 중 짧은 구절을 인용해오는 형식은 그 사상가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만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면 인용된 구절을 풀어서 설명하려면 분명 영화보다도 긴 내용의 글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느정도 눈치채시겠죠.

왜 이노센스는 굳이 잠언의 대화 형식을 취할까요?

영화라는 매체가 전달하는 형식이 관객의 집중력을 잃지 않으면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3시간짜리 영화도 있는데 3시간으로 만들면 안되냐?

3시간짜리로 만들면 이해야 쉽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철학 교육용 영상물로 이해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로 인해서 스토리의 전개는 매우 위협을 받게됩니다.

나레이션 열심히 깔다가 관객은 이야기가 어디까지 전개되었는지 순간순간 잊어버릴 수 있죠.

따라서 감독은 철학적 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취한 선택이 현재 이노센스의 모습입니다.
(이런 배경도 생각 않은 채 잘난 체한다는 식의 겸손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고 충격이었습니다.)

분명 감독은 대중 일반이 이해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느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이 갖추어진 관객이 만족해주는 것이죠.

즉, 대화에 등장하는 인용구의 기본적인 배경정도는 머릿 속에서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이야기의 흐름을 안 놓치는 사람이죠.

이것이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엄청납니다.

머릿속에서 여러가지 지식이 다시금 솟아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로부터 의미심장한 문제를 부각시킵니다.

다양한 지식들이 어떤 연계점을 지니고 이어지는 경혐은 또 다른 앎의 즐거움이됩니다.

잠언의 대화 형식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이런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상가에 대해 많은 지식이 필요한가?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자세히 몰라도 어떤 부분은 대화의 흐름상 대충 내용을 눈치챌 수 도 있습니다.

가령, "시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저가 될 필요는 없다."를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부장이 토구사에게 바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토구사가 자신은 전뇌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아느냐고 되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인데 흐름상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도 어느정도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정도의 이해가 안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탓이겠죠.

이런 정도의 인용을 멋만 부린다고 비꼬는 것은 무식한 자신에 대한 분노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물론 인용이 애초에 사상가가 의미한 것과 다르게 인용되기도 합니다.

"아직 생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랴?"

공자의 이말은 애초에 불교가 내세를 가정함으로써

현실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가치를 희석시키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죄인은 내세에서 처벌받는다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이 현세에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내세를 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하지만 영화에서는 죽음에 대해서는 사람은 알 수 없다는 의미정도로 사용됩니다.

뭐, 이런 점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옳은 비난일 겁니다.

왜냐하면 애초의 사상가의 의도와 영화가 쓴 의도를 적어도 파악하고 비난하는 것이니깐요.

하지만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비난하는 것은 이해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이니 응석일 뿐이라고 봅니다.

조만간 다음에는 이노센스의 주제 의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쓰고자 합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이로봇과 비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노센스는 비난받을까요? 아이로봇은 이해가 쉬우니 기뻐하고 흥분할 정도로 잘만들었다고 칭송하면서 이노센스는 이해하기가 어려우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내용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일겁니다.)

제 요지는 이겁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면서 비난해야지 이해못하기 때문에 별로인 영화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별로라고 말하고 싶으면 먼저 이해를 해라. 아니면 난해한 영화라고만 해야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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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Comments
1 이진  
  두분 다 똑같네요
여기서 끝네세요
1 장명일  
  그나저나 전뇌  이말 자체 만으로 이해하기 힘든게 아닐가요?
전기적 뇌... 즉 cpu머 이런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 하네요. 이해하기도 쉬운말이 있는데, 꽤나 어렵게 표현하려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난 후 느낌은 innocence라는 제목에 맞지 않게 보고나면 그찝찝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강하다 였습니다.
어줍잖은 성경 인용이라든지... 나름대로 현학적으로 전개를 하는데, 감독이 모두 이해하고 인용한것인지...
내용은 머랄까~~ 새로운 매트릭스를 보는 그런류라고나 할까...
1 황준하  
  전뇌는 한국어로 번역된 번역어입니다. 일본어로는 더 쉬울지 모르죠. 이해하기 쉬운말이 있는데 어렵게 표현하였다고 보신다면 그것은 번역가를 탓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1 이상현  
  이미 끝난 논쟁에 다시 어쩌구 하자는건 절대 아니구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러니까..이 애니의 세계관에서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뇌가 인터넷으로 연결돼 있쟎아요? 전송속도도 무지 빠를테구요..(무식해서 걍 빠를꺼라고 밖에 말씀을 못드리겠군요..)
그니깐 지식의 양은 지금의 보통사람보단 월등히 높을거란 말이죠..
(공각기동대1에서 바트가 "결국 한인간이 일생동안 얻은 지식따윈 하찮은거야"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간단히 어떤 사상가의 말을 검색해와서 대화에 끊김없이 타이밍에 맞게 말하는것 또한 그리 어렵지 않다고 본다면..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거라고..

뭐...걍 제 생각이었습니다..
딴지 환영~
2 칼도  
 
공자의 그 말은 불교와 상관없습니다. 공자가 그 말할 때 중국에는 불교가 들어와 있지도 않았구요. 그 말은 말 그대로 이해하면 됩니다.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모르는게 많고 고민할게 많은데 죽은 다음의 일에 신경쓸 시간이 어디 있느냐라는.. 
1 dlwnsah  
  관객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영화?
그런영화가 과연 성공작이라 평할 수 있을지...
'훌륭한 영화다.이런 감독의 메세지를 이해하려 하지않고 평가절하하는 관객에게 문제가 있다?' 공각 매니아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가 제대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분명 매니아로서 모든 줄거리상의 배경과 인물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면 영화 내용상의 이해를 돕는데 수월하겠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극장판 1과 2만 본 관객이라면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수준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티비판을 보지 않았으며 공각의 배경또한 파고들지 않아 이해를 하기 어렵다면 과연 수준이 떨어지는 관객으로 몰락하는것인가요?
관객에게 영화내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영화보다는 아무리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는 내용일지라도 외적으로라도 관객에게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게 훌륭한 감독이 아닐런지요.
그에반해 이번작품은 매니아들만의 전유물이 아닐까 싶군요.
1 mario  
  용어 정리를 잠깐 하자면, '전뇌'(電腦)는 중국인들이 '컴푸타'(computer)를 어케 중국말로 옮길까 절치부심하다 맹군 말임다. 물론 'GITS'에서 사용하는  '전뇌'하고는 다른 의미죠. 여기서 '전뇌'는 두뇌 기능을 에물레이션하여 '고스트'(=영혼?)를 담을수 있는 무형유형의 (전산)시스템의 의미가 강합니다.
또, 이 동네에서는 영혼을 포함한 감정, 기억등의 추상적인 정신활동조차 구체적으로 수치화가 가능한 '데이터'로 간주합니다. 복사, 삭제, 변경, 짬뽕, 확장등의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를 구분짓는 경계-샘물/무생물의 경계도-가 모호해지게 되며, 필연적으로 '정체성'문제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정체성 문제 말고 떠들만한 건더기가 없다는 생각이 들랑말랑 하네요.


부수적으로 '정신활동도 수치화 할 수 있는 데이터'라는 가정을 살짝 밀어붙이면 '네떡의 모든 데이터'와 '나'를 동일시 하는 괴물이 나오게되는데, 이거이  '쿠사나기+2501'콤보임다.

여기서 더 나가면 다분히 윤리적 색채가 강한 우주론으로 꼴인하겠죠.

'데이터의 조합인 나 또는 우리 또는 이 세상, 왜사나?'

이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비로운 whisper words of wisdom.

'生死去來 棚頭傀儡....'

이제 제단 하나 맹굴고 교주될만한 데이터 조합 하나 초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 멀티백이 있었군요. :)

- 근데 영화에서 반복 인용되는 '생사거래 어쩌구'이거 우리말로 번역해주실분?
1 MAXX  
  솔직히 한마디만 할께요.
이번껀 완전히 오타쿠용 이에요.
1 김인호  
  감독으로서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듯.. 사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1편의 망령에 갖혀서 빙빙 허공을 맴도는 가운데 핵심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철학들을 끄집어내는 건 애니감독으로서 입장이라기보다는 철학자적 입장으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작품으로 감독 스스로가 관객이 이해하길 바란다는 건 어찌보면 상당히 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보면서 우월감을 표시하는 자만심+한계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주제의식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첨단화되는 시대에 기계와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고 보여주지는데 글쎄 그것을 설명하기위해 쓸데없이 너무 많은 어려운 표현을 남발하면서 이 작품의 주제의식이라던지 그런것들마저도 모호화시켜버리는 큰 실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주제의식은 길 잃은 아이처럼 방황하고 그 주제의식을 둘러싼 허울좋은 미사여구만이 작품에서 활개를 치며 돌아다닐뿐인데 그런 모습이 마냥 고귀한 사상을 담은 엄청난 철학적작품인 것으로 오해되는게 안타까울뿐입니다. 만약 시대적으로 뉴밀레니엄을 준비하는 시대였다면 그런 소재를 다룬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같은 이 시기에는 이런 주제는 더이상 새로움이 없을뿐더러 새로움이 없더라도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접근방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풀리지않는 미로인 것처럼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전개만이 있을 뿐이니 좋은 평가를 받기도 힘듭니다.
아무튼 감독은 스스로의 한계라고 해야하나 1편에 대한 부담감을 전혀 떨쳐내지 못했을뿐더러 그가 가진 창조성마저도 고갈되었음을 증명하는 작품으로 애니로서의 스타일리쉬함은 인정하나 나머지 외적인 부분은 전혀 아니올시다란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1 김현수  
  감히 끼어드는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개인적으로 이해 가지 않는 영화나 애니(특히 이노센스같은)는 적어도 세번이상은 보는데요.. 여기 리플들을 보고 또 많은걸 깨우치고 갑니다. 정말 한 작품에 여러가지 평이 이렇게 자세히 나오다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꾸벅 (--)(__)
1 이진성  
  "아직 생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랴?"
공자의 이말은 애초에 불교가 내세를 가정함으로써 현실에서의 인간의 도덕적 의지의 가치를 희석시키는 것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죄인은 내세에서 처벌받는다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이 현세에서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공자는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내세를 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음 공자같은 성인이 과연 불교의 참뜻을 그렇게 오역했을까요...
님의 해석에 따르면 내세라는 개념 때문에 현실의 삶에서는 어떻게
살아도 좋다는 식으로 들리군요...
애시당초 붓다가 설법할때 내세라는 개념을 내세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부귀와 영화를 누려도 그릇되고 베품이 없는자는 죽어서 귀하게
되지 못하니 살아있을때 법의 테두리안에서만 혼자 잘먹고 잘살게 아니라 남에게 배풀고 자비하라는 뜻에서 그런것 입니다.
즉 중생들에게 내세라는 개념을 언급한것은 현실의 삶에서 보다 자비롭고 충실해라하는 피드백으로 생각하수 있는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