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에 대한 주관적 생각.

영화감상평

올드보이에 대한 주관적 생각.

1 송영전 4 2488 1
올드보이는 2003년 한국 최고의 작품이라 칭하는 “살인의 추억”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개봉을 하였다. 개봉 전부터 최민식이라는 연기파배우와 스타급배우 유지태의 출연, “공동경배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을 감독한 작가주의 감독 박찬욱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 미네기시 노부야기의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에 이은 2번째 복수시리즈라는 것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더욱 더 부풀어 올렸다. 또한 이 영화가 개봉 전에 일본의 도시바에 한국 역사상 가장 비싼 수출가를 얻으며 팔려 나갔다는 것도 그 기대를 한껏 더 올리기도 했다. 그런 기대를 안고 영화는 개봉했고 200만이라는 관객수와 네티즌들의 그의 영화에 대한 찬사가 계속되었고 결국, 국제 영화 페스티벌 중 하나인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음으로써 재개봉됨과 동시에 다시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럼 영화에 대해 한번 들어가 보자...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주제로 다루었던, 어찌 보면 영화라는 예술에 영원한 소재인 “복수”를 다루었다.
또한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작품에서의 박찬욱 감독만의 특유함이 이 영화에서도 묻어나 있고, 두 영화의 비슷함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또한 확연히 다르다. “복수는 나의 것” 이라는 영화가 작가주의적 색깔이 깊고 그 영화가 내포하는 세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담겨있는 것에선 비슷함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인 영화적 색깔, 카메라 구도 등 전반적으로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 감독적 색깔이 변했다기 보다는 업그레이드 됐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영화는 오대수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잡고 있다. 영화의 초반 오대수의 대사(“내 이름이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산다해서 오.대.수라구요”)에서 많은 관객들이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웃음보다는 반성의 소리에 더 만족함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오대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대부분의 오대수에게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오대수가 감금을 당하다 풀려나며 죽고 싶어하는 한 캐릭터를 만난다. 그 캐릭터가 죽으려 하지 그는 그를 붙잡는다. 이 장면에서 어찌보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겠지만...
일단 오대수는 자기가 감금을 당한 그 이유를 위해 살고자 한다. 하지만 죽으려 하는 캐릭터는 세상을 원망하며 죽으려 한다. 여기에서 영화는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은 분명 어떠한 목적에 의해 삶을 살아간다는 것...
또한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다시 말해 인간이기에 살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히 영화 후반부에 보면 오대수와 최면술사의 대화가 있다. 그 대화중 최면술사가 오대수에게 최면을 걸게 해주는 요인이 있다. 오대수의 편지글이다... 그 글을 읽어보면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해도 살 권리는 있는 것이 아닌가요?”가 적혀 있는 데 이 글을 통해서도 인간의 존엄성의 위대함을....다시 말해 인간의 가치성을 밝히며 그 삶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 세상을 원망하며 죽으려 하는 캐릭터도 영화의 초반부에 오대수에게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 해도 살 권리는 있는 것이 아닌가요?” 라고 말한다.

또한 자살하려는 캐릭터는 오대수와의 대화속에서 분명...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자살하려는 이유가 바로....외로움인 것이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유기체는 분명 사회라는 집단에 속해있고....사회라는 집단에 속해있지 않다면 인간은 형성화 될 수 없다. 사회속에서 인간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관계가 끊어진다면 당신 또한살고 싶을 까? 지금 사회적으로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무관심의 비중이 커짐으로써 동시에 그 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살하려는 한 캐릭터를 통해 지금 사회적 문제점이 되고 있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의 무관심을 찝고 있는 것이다.
(오대수가 자살하려는 그를 구해준 후 그는 오대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대수가 그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채 떠나자 그는 자살하고 만다.)

더욱히 오대수라는 캐릭터가 감금방에서 탈출 한 후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꾸하는 말들을 통해, 또 TV라는 매체를 통해 여러 가지 지식적인 것을 습득하고 그에 대해 정의식으로 대답하지만, 그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통해 다른 어떠한 형식의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들보다 인간과의 만남, 인간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 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우진이 감금관리자와 전화통화를 하는 도중에 감금관리자는 묻는다. “도돼체 어떤 잘못을 했길래 15년이나 감금하려 하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우진은 “오대수는 너무 말이 많아요” 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영화는 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자기가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지녀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대수 또한 별 생각없이 한 말이 결국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또한 영화는 출연하는 각각의 캐릭터를 통해 변화하는 시대에 의해 변해 가는 인간의 추악함 등 인간의 양면성의 극대함을 여실히 표현함으로써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또한 감독은 오대수가 이우진을 찾기 위해 감금방을 찾아가서 혈투를 벌일 때 롱샷을 비롯해 풀샷 등 다양한 샷으로 관객을 관찰자적 입장으로 만들어 3분동안 롱테이크 함으로써 관객들에서 폭력의 미학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의도하고 있다.
그리고 감금방 관리자의 이를 뽑을 때, 피가 난자한 혈투에서 클래식을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잔임함의 표현을 단지 하나의 영상으로 느끼게 함으로써 요즘의 인간이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고 인식해 가는지, 아니 변해 가는지를,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아니 관객들을 실험함으로써 관객들을 의도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오대수가 자기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회피를 위해 최면에 걸린 후 최면에서 벗어나 미도를 만나는 장면에서 그 배경은 온통 하얀 눈 투성이다. 여기서 이 눈으로 둘러싸인 이 공간은 전 칼럼인 피아니스트, 스캔들의 공간적 의미와 비슷하다. 바로 깨끗함을 뜻하고 잇는 것이다. 바로 오대수는 그 깨끗함을 위해 최면을 걸지만 최면이 풀린 후 미도와의 만남에서 오대수와 미도의 걸음에서 남겨지는 눈 사이의 발자국을 통해 그 잘못을 없애지 못하고, 아니 없앨 수 없고, 피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마지막 미도를 껴안으며 교차되는 오대수의 표정을 통해 그 잘못을 피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감독은 영화에 대한 반전을 미리 암시하고 있다.
먼저 광학효과를 통해 대수와 우진의 얼굴이 반절씩 연결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을 통해 대수는 자신의 딸과....우진은 자신의 누나...곧...비슷한 행동을 통해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히 중반부에 이우진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 오대수의 PC방 친구가 이우진이 접속한 네이트 아이디를 추적하여 조사하는 데...조사결과 이름과 주소를 알게 되는 데...이름은 “수대오” 주소는 미도의 집 뒤 빌라....즉 오대수를 뒤로 읽으면 수대오가 되는 것이고 현재 살고 있는 집인 미도의 집, 뒤가 그가 있었던 장소인 것이다. 다시 말해 다시 한번 오대수와 이우진과의 관계를 나타내며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영화를 초반부터 집중했다면 대수가 술에 취해있을 때 날개짓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후반부에 대수가 우진을 만나는 장면에서 교차편집을 통해 미도가 날개짓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날개짓이라는 하나의 행동이 그들을 연결시겨줌과 동시에 날개 또한 연결적 코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억지일수도 있겠지만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선물로 준 휴대폰이 이우진과 같은 모델의 휴대폰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예술성 짙은 매체는 관객들에게 어떠한 것을 통해서든 분명 쾌락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영화 올드보이는 그러한 쾌락보다는 관객들에게 불쾌함을 선사하고 있다. 분명 영화는 확실하고 소름끼칠 정도에 반전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반전은 참으로 끔찍하다.
반전에 놀라며 그 반전에 대한 쾌락이 있긴 하지만 그 반전을 통해 얻어진 만족감의 쾌락은 잠시 사이에 끔찍함으로 변하고 만다.
또한 감독은 살인과 폭력, 죽음이라는 조심스런 소재를 관객들에게 비판적 시각으로 전달하려 했지만, 비판적 전달을 위해 여러 가지로 쓴 작가의 의도가 빗나가서 관객들에게 폭력과 살인, 죽음을 너무나 쉽게 어필하진 않을 까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오대수와 미도와의 리얼리성 섹스 묘사는 감독의 작가주의적 리얼리성 표현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또다른 면에선 감독의 이성에 의문점을 얻기도 한다.

확실히 이 영화를 평할 순 없지만 이 영화를 통해...
르와르라는 장르의 시도, 그 장르에서의 놀랍고도 끔찍한 연출력 등을 보았을 때, 한국 영화의 놀라운 발전과 그에 대한 기대를 만드는 수작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껴지는 이 씀쓸함은 무엇이며 또한 오대수가 이우진에게 잘못을 구하는 처절한 모습을 보았을 때, 영화적 내용에서 떠나 세상의 모든 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현대인간의 결말은 아닐까? 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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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수와 미도와의 섹스씬에서 나오는 클래식은 1.반전을 위한 준비된 연출인가? 아니면 2.감독의 관객들에 대한 우롱인가? 아니면 3.감독의 이성적 문제인가?
1. 대답-이 물음이 맞는다면 끔찍한 연출력을 보여준 박찬욱 감독에게 박수를 쳐줄것이다.
2. 대답-죽이고 싶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 이성관의 혼란을 해결해야 한다.
3. 대답-감독의 이성관을 해석하기엔 난 아직 영화를 모른다. 그래서 아무런 변을 못한다.








감독 : 박찬욱
주연 : 최민식, 유지태, 강혜정
장르 : 드라마, 느와르
등급 : 18세 이상
상영시간 : 120분
제작년도 : 2003
개봉일 : 2003년 11월 21일
국가 : 한국
공식홈페이지 : www.oldboy2003.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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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10 파천왕  
  원작인 만화책을 보면 역시나 미도와의 섹스씬이 나옵니다...
전 영화보면서 단순히 원작에 충실한 연출인줄만 알았죠...
근데 그 장면을 그런식으로 각색한 감독의 발상이 참 놀랍더군요..
전 1번쪽이 맞는것 같네요...
1 롤러스티커  
  4. 약하다... 더 끔찍 했으면 예술로 쳐줄수 있을것이다..
1 변성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 굿!
쪼금 억지부분도 있구요...
절때 태클 아님다.
1 이경훈  
  꿈보다 해몽...이란 생각이 드네요...